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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일 Feb 11. 2019

제3회 - 준비 기간 (1)

1997년 1월 3일 금요일 : 희망 고문 사건

1997년 1월 1일. 기대감을 가지고 한국일보를 펼쳐보았다.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변했다. 그 전 해 말에 나는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작품을 제출했다. 매년 1월 1일은 각 일간신문들이 신춘문예 당선자를 공고하는데 그곳에 내 이름은 없었다. 아마도 내 기억에 1월 1일은 각 부문의 신춘문예 당선자의 이름이 발표되고 그다음 날은 시, 소설 등의 심사평이 나오고 또 그다음 날 희곡을 비롯한 나머지 부분의 작품들의 심사평이 실렸던 것 같다. 이틀 뒤. 1월 3일 늦은 아침. 신년이 시작된 지 3일째였지만 여전히 신년의 분위기가 나는 신문을 졸린 눈을 비비며 읽었다. 그런데 거기에 내 이름이 있었다. 희곡 부문의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에.


1995년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학과의 선후배, 동기들과 함께 학과 내 극작가 동아리를 만들었다. ‘괴발개발’. 우리의 스승이신 이원기 교수님께서 개발새발 이런 거 어떠냐고 하셨다. 서툴더라도 무작정 쓰는 무식이 용감인 극작가 모임이 되어주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사전을 찾아보니 개발새발의 본딧말은 괴발개발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괴발개발로 그 동아리의 이름을 정했다. 선배 김태연, 동기 김인희, 박칠순, 이원희, 조창렬, 후배 문성준 그리고 나. 극작가 모임의 첫출발로 세 편의 단막극 작품을 공연하기로 했다. 1995년 6월 13일과 14일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의 연극학과 소극장에서 그 세 편의 작품을 공연했다. 그중의 한 작품이 내가 쓴 <열려가는 날>이었다. 1년 반이 흐른 후 그 작품의 대본을 거의 다듬지도 않고 한국일보로 보냈던 것이다. 신춘문예에 도전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촌놈이 신춘문예가 얼마나 만만치 않은 문학의 등용문이라는 것도 모른 채. 여러 신문사에 제출도 안 해보고 한 곳으로만.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슬쩍.

스크랩 해 놓은 199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심사평.

그때의 신문을 가위로 오려서 스크랩한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 심사평의 내용 중. “심사위원들은 특히 세 작품에 주목했다, 고성일의 「열려가는 날」은 극의 영화적인 구성과 효과적인 무대 공간의 사용, 구체적인 성격 창조력 등이 돋보였다. 그러나 소외된 두 남녀가 각각 그동안 살아온 삶을 정리하는 극의 결정적인 반전에 정당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아쉬웠다.”     

신문에 내 이름이 나오니 졸린 눈이 번쩍 떠질 수밖에.      

최종 당선작 후보 세 작품 안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용기가 났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다. 신춘문예 당선에 미련을 접은 지 벌써 오래지만 이 기대감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조금만 더 하면 뭔가 손에 쥘 것 같다는 희망 고문이 되고 있다. 어쨌든 이 사건은 나에게 극작가의 꿈을 구체적으로 꾸게 한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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