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성경책을 펴서 읽고, 주말에는 교회에 나가고.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도 마음 둘 곳이 필요하니까. 사람이라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기대고 싶은 무언가를 찾고 싶어 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하나님의 뜻과 사랑으로'라는 말로 귀결시키는 엄마의 사고 흐름에는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다.
한 병원에서, '내 뇌세포가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종이 가라앉거나 재활을 열심히 하면 원래의 80퍼센트까지 되돌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병원과 의사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엄마에게 그 말은 심장보다 더 깊숙한 곳에 박힌 모양이다.
역시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셨어! 우리 딸 다 나을 수 있단다. 하나님이 지켜주셨다. 아멘!
엄마는 그렇게 확실하지도 않은 80퍼센트의 희망을 붙들었다. 매일 나가서 아파트 한 바퀴씩 돌아라, 이미 다니고 있는 재활병원 외에 다른 재활센터에서 추가로 운동을 해보자. 이거 꾸준히 마시면 좋다는데 마셔라. 처음에는 엄마의 이런 간절함에 어떻게든 부응하려 했지만 정도가 지나치니 점점 짜증이 났다.
착한 딸이 되고 싶었고, 엄마의 기대에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아 나를 수용하려는 시기였다. 나 조차도 나를 정의하지 못해 방황하는 시기였다. 그런 나에게 엄마의 간절함은 부담감이 되었다. 꼭 내가 재활과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 간절하지 않아서 이 상태에 머무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전의 나로 돌아오는 것이 평생에 걸쳐 이루어야 할 과업이 되어, 나를 무겁게 누르는 것 같았다.
"엄마 내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지금 상태에 잘 적응하고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함이지, 완벽히 나으려는 게 아니야. 인정해야 해 엄마. 나 예전처럼은 못 돌아가."
엄마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말이었지만, 엄마와 내게 꼭 필요한 대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울었듯이 엄마에게도 딸은 예전의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남아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도 봐야 한다고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고 외쳤다.
하지만 엄마는,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엄마는 그런 내게 "너는 그렇게 생각해. 엄마는 나을 수 있다고 믿을 거다." 라며 나보고 절망하지 말라고 했다.
절망? 절망은 내게는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나 사그라든 감정이었다. 절망이라는 거센 감정의 소용돌이가 피곤할 만큼 그때의 나는 지쳐있었다.
"엄마, 그냥 받아들여. 이건 그냥, 이렇게 될 일이었던 거야. 오른손 오른 다리로 어떻게든 살아갈 노력을 해야 할 때야. 아니면 계속 기약 없는 일을 기대하며 스스로에게 희망고문을 해야 해. 그것도 평생을. 그건 너무 불행하잖아."
엄마는 울었고, 엄마는 내게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제발 포기만 하지 말라고 했다.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그때는 차라리 병원에서 우리 모녀에게 더 이상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으면 하고 바라었다. 그게 나에게도 좌절이 될 걸 알면서도, 누군가 이 기나긴 과정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면 했다. 그러면 엄마도 깔끔하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엄마의 간절함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일화가 있다. 세상에는 마냥 선하고 진솔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왼발에 편마비가 시작된 초기는 엄마가 아직 불교를 믿었을 때다.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잘 아는 스님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게 찾아간 절은 조계종도, 뭣도 아닌 정체불명의 건물이었다. 간판에서부터 의심스러웠고 동행한 남편도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때 만난 스님은 엄마에게 조상 중에 머리를 다친 사람이 있는지 물었고, 그분(할머니)이 내 뒤에 있는 게 자기는 보인다고 했다. 자기처럼 수행을 많이 한 사람만 볼 수 있다고 했다.
'자기 후손을 이토록 미워하는 조상님은 없을 것 같은데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엄마의 체면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스님이 이상한 펜던트를 들고 내 왼쪽다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려 '지금 왼쪽 다리가 뜨겁게 느껴지지 않아요?' 했을 때는 참지 못하고 '아니요, 전혀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스님 입에서 천도재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내가 아파서 별 꼴을 다 본다 생각했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엄마에게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다행히 엄마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더 이상 내게 스님이니 천도재니 하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엄마는 십자가를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며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이전의 일도 있었겠다, 엄마가 간다는 교회가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닐까 내심 의심하며 뒷조사를 했지만, 다행히 지역에서 꽤 크고 멀쩡한 장로교회였다. 그래, 이상한 스님 말에 휘둘리는 것 보다야 교회 가서 찬송가 부르고 기도하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나 엄마가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며 열심히 신앙심을 기를 줄은 몰랐으니까.
80퍼센트의 가능성. 그 말을 꺼낸 의사는 구체적인 시기나 방법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의사는 엄마의 간절함에 대답한 것뿐이다. 잘 되면 좋은 거고 아님 말고 식의 장난에 나는 더 이상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엄마는 아직 병원을, 의사를, 그리고 사람을 믿었다. 어쩌면 나보다는 엄마가 더 강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내가 앞으로의 생을 평생 이 상태로 지내다가 눈을 감게 될 확률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너무 비관적인가 싶지만 애매한 희망은 나의 현재를 모두 부정하는 것 같다. 그러니 장애인이라는 타이틀을 단 채로, 그냥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산다.
엄마는 내게 장애를 극복하려면 강한 마음으로 필사적이 돼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냥 매일을 그냥저냥 살고 있다.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장애를 적응해야 하는 건지, 극복해야 하는 건지, 견뎌야 하는 건지. 바란다고 될 수는 있는 건지에 대한 답도 아직 찾지 못했다.
엄마의 모든 노력들이, 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을 안다. 나에게 엄마는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엄마를 보면 안타깝고, 화가 나고, 답답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사랑이다. 사랑 외의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엄마가 나에게 주는 사랑은 내가 말하는 사랑과는 다른 또 다른 형태의 무언가인 것 같다.
엄마에게 교회에 다니지 말라는 등의 말은 할 수 없다. 엄마 또한 받아들임의 과정이 필요하겠지. 다만, 엄마의 가장 큰 의미가 내가 아닌 엄마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가끔 솔직하게 이런 생각이 든다. 엄마가 먼 훗날, 세상을 떠나는 날. 그때까지도 내가 장애인이라면 엄마는 슬플까? 괴로울까? 마지막까지 편히 눈을 감지 못할까? 아니면 그때의 마음은 또 다를까.
내가 여전히 장애인인 채 엄마의 마지막을 보낸다면, 나는 엄마에게 큰 잘못을 하게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 심장이 아려온다. 그리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불안이 더욱 가깝게 들러붙는다.
그때에 이어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와 엄마는 어느 평범한 모녀처럼 지낸다. 가끔 말다툼을 하고, 그러면서도 몇 시간 동안 전화로 웃으며 안부를 묻고 서로를 챙기는 그런 사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엄마는 슬퍼할지언정 장애가 생긴 딸을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그리고 오히려 자꾸만 숨으려는 나에게 피하지 말라고, 떳떳하라고 말한다. 엄마 덕분에 나는 다시 학교로(이 글을 쓰는 글쓴이 직업은 교사다.)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 엄마는 엄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