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시도는 실패였다. 죽는다는 게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죽음조차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운 인생은 뭘까,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방문을 열고 나오니 반려묘가 문 앞에서 항아리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모든 과정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실패한 동안. 고양이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냐옹"
내 눈을 보고 고양이가 짧게 울음소리를 내었다. 딱 그 한마디. 나를 조르지도, 설득하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짧은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펑펑 울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생각은 단순했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고양이,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살자. 내가 길에서 데려와 평생 책임지기로 했으니, 딱 그때까지만 살자. 그렇게 하나의 이유를 붙잡고 살다 보면, 조금씩 살아야 하는 이유가 늘어나지 않을까.
모든 일을 알게 된 후 남편은 분노했고, 울었고, 나를 붙들었다. 남편과 가족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때의 내게 살아야 할 이유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대하고, 희망을 품고. 그러다 실망하는 일들의 반복에서 사람이 싫어졌다.
남편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두 번째 신경정신과는 다행히 내게 잘 맞았다. 첫 번째 방문했던 신경정신과는 예약이 되지 않아 2-3시간 기다려야 했고, 이는 당시 공황을 앓던 내게는 끔찍했다. 두 번째 신경정신과(이후 B신경정신과)는 철저한 예약제였고, 대기하는 사람들로 복잡하지 않았고, 내부도 안정되고 깔끔했다. 무엇보다 꽤나 젊은 여자선생님이 산뜻하게 상담을 진행하는 점이 좋았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스트레스에 대한 대응은 잘하고 있다고 하셨다. 의외였지만 수치가 그렇다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현재 처한 환경에 의한 우울과 불안이 높다고 하셨다. '그럼 제 몸이 좋아지지 않는 한 저는 계속 우울한가요?'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약을 처방받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이 병원은 꾸준히 다닐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남편은 안도했고, 그날 밤 나도 약을 먹고 푹 잠들었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B신경정신과를 내원하며 상담을 받고 있다. 물론 가끔씩 이유 없이 눈물이 나거나, 기분이 땅끝까지 떨어지는 날도 있다. 너무나 외롭고, 공허해서. 조용한 우주, 혹은 깊은 물속에 홀로 둥둥 떠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의 가장 큰 어려움은, 더 이상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세어보며 아직 살아내야 할 날이 많다는 점에 분노했다. 이전의 내가 꿈꿔왔던 많은 것들이 '장애'라는 요소로 세세한 어려움을 품는다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한동안은 일부러 가고 싶던 나라의 여행 브이로그를 찾아봤다. 이유는 단순히 울고 싶어서다. 교사가 되기 위한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혹독한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이었다. 학기 중에는 아이들과 행복하고 멋진 시간을 보내야지. 그리고 방학 때는 가고 싶었던 곳에 자유롭게 날아갈 거야. 일부러 브이로그를 보고, 울었다. 아 저곳은 계단이 많아서 내가 가기엔 힘들겠어. 저 식당도 2층이라 올라가기 어려워. 저 식당은 좌식이라 내가 앉기가 어려워. 나 혼자서는 갈 수 없어.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면, 브이로그 속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과 반대로 나는 울었다.
그때는, 습관적으로 울음을 쏟아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울고 나면 속이 묘하게 시원해진다는 점도 한몫했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고 왜 스스로 자책하며 본인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냐고 했다. 나에게 그럼 처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기보다 장애가 더 심한 사람은 그냥 바로 죽어야겠다고 소리쳤다.
"오빠는 정상인이잖아."
논리도 없고 이성도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가 될 수는 없었다. 온전히 내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철저하게 혼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나의 아픔과 장애는,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삶 또한 일그러뜨렸다. 그 점이 내게는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된 건 나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이전처럼 알아서 자신의 삶을 살기 바랬다. 하지만 부모님, 특히 엄마는 나에게 매달렸고,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가 갑자기 종교를 바꿨다. 신실한 불교신자가 갑자기 성경책을 읽고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신은 사이코패스라니까. 우리 편이 아니라니까.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답답했다. 역시 그때 죽었어야 했어. 내가 이도저도 아니게 살아있으니까 되지도 않는 희망에 매달리는 거야. 답답했다.
엄마의 기도는 오히려 내게 섬뜩했고, 이질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