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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냥 Aug 29. 2024

불행이 찾아오는 주기

  공황이 최고조로 다다랐을 때는, 내가 세 번째로 경기를 일으켜 의식을 잃은 후였다. 세 번째 경기는 내가 동생을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을 하던 중에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두통이 심해졌고, 엄마에게 전화를 거니 당황한 엄마는 얼른 병원에 가라고 하셨다. 부모님은 모두 직장에 계셨고 집에는 나와 막냇동생 둘 뿐이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마약성 진통제를 먹고, 평소 운전하던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병원을 향해 가던 중,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오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왼손. 왼손이 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렸다.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 덕분일까. 나는 대기하던 차의 신호가 바뀌자마자 차를 갓길에 세우고 비상깜빡이를 틀었다.


  "나 또 몸이..."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왼손부터 시작해 팔, 그리고 얼굴까지 덜덜 떨리고 사람이 이런 형태를 만들 수 있을까 싶게 몸이 뒤틀리고 오그라들었다. 이미 두 번이나 겪었기에 익숙한, 하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혈관이 오도도독 끊기는 것 같았고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의식이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역시 달리는 구급차 안. 아 그렇구나 나 또 기절했구나. 이게 나의 세 번째 경기였다.


  앞선 두 번의 기절도 힘들었지만, 차 안에서의 세 번째 기절은 몸보다는 심적으로 힘들었다.


  만약 차를 멈추지 못하고 기절했다면. 끔찍했다. 당장 나뿐만 아니라 동생,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를 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 몸을 내가 통제하지 못한다는 공포. 조금 더 현실적으로 와닿은 죽음이 날카롭게 마음을 베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절대로 운전을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뇌부종으로 인한 경기라며 경기를 예방하는 케프라라는 약을 주었다. 그리고 함께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부모님이나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이동하면 단거리어도 차 안에서 내가 죽을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뛰면 또다시 기절할까 두려웠다. 그때마다 처방받은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공황과 불안이 심해지고,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관리자와 면담 중에 심장이 빠르게 뛰어 잠시 양해를 구하고 주섬주섬 약을 꺼내먹었다. 내 증상이 뇌부종 때문인지, 공황발작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좋아질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긴 병휴직을 선택했다.


  휴직을 하면서 남자친구는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늘려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 덕분 일까. 차츰 나는 괜찮아졌고, 예정대로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내가 금방 좋아질 거라고 믿었고, 나 또한 그 믿음에 응답하고 싶었다. 얼마나 잘 사려고 그러는지, 액땜한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신이 있다면 사이코패스가 분명하다.


  어느 날부터 머리를 감으면 오른쪽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졌다. 흔히 여자들이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다고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그저 걷기만 해도 한 묶음씩 툭,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계속해서 머리카락은 두피에서 사라졌고, 나는 왼쪽에는 긴 머리, 오른쪽에는 반질반질한 대머리인 이상한 스타일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이 또한 방사선수술의 부작용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여러 부작용 중에서 탈모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머리카락이야 다시 자라는 거니 시간이 약일 것을  믿었다. 가발전문점에서 가발을 맞추고 그날 밤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이것으로 불행이 끝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바보같이. 신은 나 따위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는데.


  몸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이전에 간호사로 근무했던 동료선생님과 필라테스 선생님이었다. 그들은 내가 걷는 모습을 유심히 보더니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어느 날, 왼쪽 신발을 서서 신기가 어려워졌다. 신발에 발을 집어넣어야 하는데 발이 입구에서 들어가지 않았다. 슬리퍼는 신고 걸으려는 순간 슝하고 날아가 한 발자국을 걷지 못했다. 샌들은 구멍이 난 틈으로 발이 자꾸 미끄러져 꺾였고, 운동화를 신어도 걸음이 절뚝였다.


  내가 첫 번째로 쓰러지고 정확히 일 년 뒤에 찾아온 왼발 편마비였다.


  사실, 방심하고 있었다. 세 번째 경기가 있고 나서 아무런 이슈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대로 회복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중간중간 두통과 탈모 등 생각지 못한 일이 있었지만, 약이든 시간이든 해결방안은 있었다.


  하지만, 편마비는 달랐다. 병원에서는 이후 나를 '특이 케이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흔치 않은 부작용을 보이는 환자라는 뜻이다. 나는 특이 케이스라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나일까. 병원도, 의사도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수술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수술인 것처럼 말했으면서! 이렇게 돼서야 각종 핑계를 붙이다니! 결국 특이 케이스의 주체는 뭔가. 바로 나 자신이다. 이 모든 증상들이 내가 '특이해서'라고 하는 그들의 명칭에 환멸이 났다.


  병원에 오래 입원했다. 뇌부종을 가라앉히기 위해 고용량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으나 예후가 좋지 않았다. 오히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쿠싱 증후군을 앓았다. 퉁퉁 불어 풍선처럼 변해버린 몸, 곳곳의 튼살, 달덩이 같은 얼굴, 반질반질한 두피. 점점 편마비가 심해지는 왼쪽 발. 결국 보조기를 맞추고 난 밤. 다인 입원실에서 이쯤 되면 그냥 죽으라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결혼식이 채 두 달 남은 시점이었다. 이 모습으로 타인의 앞에 나서기 싫었다. 결혼식을 미루고 싶었지만, 남자친구는 반대했다. 반대한 이유가 타당했기에, 나는 수긍했다. 결국 그 끔찍한 결혼식이, 나에게 고칠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음에도.


  결혼식 당일에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축하의 말이 아니었다. 물론 진심 어린 축하를 해준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의아해했고 신부가 아프냐, 임신했냐, 사진이랑 다르다 등의 말을 수군거렸다. 절뚝이는 발을 보완하기 위해 스트랩을 추가한 플랫슈즈를 신었다.


  젠장! 차라리 보조기를 신고 당당히 맨발로 행진할 걸 그랬다. 보란 듯이 그랬다면 통쾌하기라도 했을 텐데. 분명히 아픈 내가, 아프지 않다는 연기를 하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본식이 끝나고 한복을 입고 잠시 쉬는데, 큰 형님이 다가와 걱정스레 괜찮냐고 물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진한 신부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아픈 사람이구나. 그리고 신혼여행 첫날밤. 나는 정말 모든 것을 쏟아내듯 울었다.


  최악, 최악이야! 하며 뚱뚱하게 녹아내린듯한 사진 속 내 모습을 저주했고, 남편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하객들에게 들은 말들이 심장에 내리 꽂혔다. 지인들이 보내준 사진은 보지도 않고 지웠다. 지금 생각하면 아픈 나를 끝까지 믿어주며, 곁을 지켜준 남편에게도 가혹한 처사였다. 결혼식 후 미친 듯이 울부짖는 신부라니. 다행히 신경안정제와 여행지에서의 설렘 효과로 신혼여행은 즐거운 추억으로 마무리되었다.


  결혼식과 신혼여행. 이 기막힌 날들을 그리워할 줄은. 그때의 사진을 보면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아, 그래도 이때는 손은 멀쩡했어. 왼손으로 부케도 들고, 핸드폰도 들고, 브이도 했잖아. 봐봐, 머리도 묶을 수 있었어.  지금은... 아니잖아.


  그렇다. 왼발에 편마비가 시작되고 또다시 일 년 뒤. 이번에는 왼손에 물건을 집기가 어려워졌다. 가장 큰 변화는 컴퓨터 타자를 누를 때 손가락이 뻣뻣하고 쥐가 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미 왼발 편마비를 겪었기에,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나의 왼쪽은 정상이 아니겠구나, 하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았지만, 수확은 없었다. 이미 다녔던 병원뿐 아니라 서울의 유명한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녀도 대답은 같았다. 뇌부종의 위치가 좋지 않다. 감각 및 운동신경을 누르고 있다. 부종이 빠지면 좋아질 수도 있지만, 이미 죽은 뇌세포는 살아나기 힘들다. 그래도 근육이 떨어지지 않게 재활 열심히 하시라.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꼭 사망선고 같았다.


  차라리 첫 번째로 쓰러졌던 그날. 아름다운 겨울 바다를 보고 돌아온 그날. 그대로 쓰러져서 영영 깨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쓰러지기 직전 몸의 신경이 꼬였을 때 고통스러웠지, 의식을 잃은 직후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데. 죽음이란 그렇게 찰나의 것일지도 모르는데.


  굳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강한 충동이 들었다.


  창밖으로 걸어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부러웠다. 예전에 나는 특별해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해지고 싶었다. 누군가 지독하게 원망하고 싶은데, 원망하고자 하는 대상을 떠올리면 그들에게도 각각의 이유와 삶이 있었다. 결국 원망의 대상은 내가 되었다.


  죽을까? 한번 시작된 생각은 물꼬를 튼 듯 여기저기 뻗어 나갔다. 그래, 죽자. 다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거나 아님 이대로 끝을 내도 좋겠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다짐이 행동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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