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지금까지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갖은 시련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나아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만화 여주인공처럼, 시련은 사람을 더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하, 그건 정말이지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할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지금껏 내가 시련이라 느껴왔던 많은 것들은 사실 답이 있는 문제풀이에 불과했다. '진짜' 시련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답이 없는데 자꾸만 해답을 내놓으라고 한다. 연속으로 다가오는 시련 앞에서 인간은 그저 나약할 뿐이다.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장애가 생긴 이후로도, 나를 보며 강하고 침착하다고 했다. 나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건지 의아했다. 그들만의 위로법인가, 아님 내가 꽤나 소질 있는 연기자인가. '진짜 나'를 보게 되면 나를 멀리 하려나.
어느 날은, 유튜브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정보가 있으면 얻고, 나와 같은 기분을 겪고 살아가는 이가 또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유튜브 자체가 많지 않았고, 자신의 절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는 더더욱 드물었다. 유튜브도 결국은 보여 주기 위한 SNS다. 영상 속의 그들은 장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고, 일상을 보내고, 삶을 누리고 있었다. 댓글에는 그들의 밝음을 찬미하며 자신도 희망을 얻었다는 말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베베 꼬인 건지. 반짝반짝 빛나는 그들을 보면서, 오히려 왜 나는 그렇게 단단해지지 못할까 스스로를 자책했다.
남편 또한 장애인 인플루언서를 예로 들며, 이 사람들 좀 보라고, 대단하지 않냐고 물었다. 농담으로, 나도 유튜브를 시작해 보라고도 했다. "미안 오빠, 나는 아직 숨고 싶어. 당장 학교에 복직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무서운데 세상 앞에 나갈 용기는 없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퉁명스레 대답하자, 남편은 그래, 이해한다며 나를 안아 주었다.
유튜브 속 그들은 정말 대단했다. 한쪽 팔을 절단했어도 남은 한 팔로 테니스를 치고, 수영을 했다. 휠체어를 타고 홀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캠핑을 가고, 사람과의 만남에 주저함이 없었다. 물론 그들에게도 힘겹고 어둠으로 가득한 시기가 있었겠지. 눈으로 보이는 한 부분을 보고, 나와 그들의 삶을 재단하며 우울해하는 나 또한 이상한 사람이다.
내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감에 눈물을 흘릴 때마다,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도 너는 이 정도면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부모님도 동생도 있고, 직장도 있고, 남편도 있지 않냐고. 주어진 것들이 이토록 많은데, 이제 그만 절망하고 빛 속으로 걸어 나오면 안 되겠냐고. 너보다 더 어려운 사정이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으냐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 내가 꼭 고집 가득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더 달라고 떼쓰는 소설 속 악녀가 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쿨한 척, 괜찮은 척을 해보기도 했다.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괜찮다, 괜찮다고 되뇌어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괜찮을 리가 없잖아!'라고 소리 지르는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글을 쓴다. 나의 유일한 독자인 남편은, 내 글을 읽으며 '독자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글'이라고 평했다. 정말 가차 없었다. 사실 나도 그 점이 우려되었기에 희망과 밝음이 묻어나는 글을 써볼까 했다. 하지만 그럼 그 글은, 반쪽짜리 글이 아닌가. 글 속에서도 "저는 괜찮답니다."라는 가면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았던 것도 이런 고뇌의 과정 때문이었다.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를 불쾌하고 우울하게 만들어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글쓰기 자체가 나에게는 정화고, 위로고, 채찍질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 작은 욕심이 있다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나처럼 아직 답을 찾는 중인 이들이, 어둠에 위로받았으면 했다. 드리운 어둠에 몸을 숨겨 울 수 있는 시간을 적어내고 싶었다. 한동안은 나도 빛을 찾아, 그 따스함에 위로받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 눈부신 밝음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나를 적나라하게 비춰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때 내게 필요한 것은 억지로 내 손을 잡고 빛으로 이끄는 누군가가 아니라 숨을 수 있는 어둠을 찾아주는 사람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은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그런 마음으로 나의 우울과 불안을 녹여낸다. 이 글의 끝을 정해두지 않았기에, 이 글이 산으로 갈지 바다로 갈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써 본다. 그렇게 또 하나의 글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