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가 끝났다는 건조기의 경쾌한 마무리 멜로디가 흘러나와 문을 열었다.
따뜻한 기운이 훅- 밀려오면서 문쪽 고무패킹에 5천 원짜리 지폐가 마치 물 주기를 잊은 채 바짝 발라버린 천냥금의 이파리처럼 뒹굴고 있다.
완전 득템!
가끔 세탁기나 건조기에서 지폐를 발견할 때면 남편이 수고롭게 빨래해준 내게 준 선물처럼 느껴져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나는 지폐나 동전을 지갑에 넣어야 하는 불편함이 귀찮아 현금보다는 카드를 사용하는 편이고, 현금이 있었다 하더라도 애초에 지폐를 바지 주머니에 그대로 넣는 일은 없다.
하지만 남편은 종종 현금을 사용하고 거스름돈을 옷 여기저기에 쑤셔 넣는 습관이 있다.
게다가 본인이 바지 주머니에 현금을 넣어두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다반사라 내가 얘기하기 전에는 본인의 돈이 건조기에서 바짝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남편의 이런 습관은 지폐 구경하기 어려운 나의 지갑에 지폐를 넣는 일을 만들어 주곤 했고,빨래를 하다가 찾아온 생각지 못한 행운은 종종 내게 집안일을 하는데 오는 소소한 즐거움이 되기도 하니 딱히 불만이 될만한 습관은 아니다.
모든 부부가 그렇듯 우리 부부도 서로 닮은 듯 다른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연애 때야 서로 다름에 끌렸다지만 결혼을 한 이후에는 그 다름이 복리처럼 살뜰히 쌓여가고 불어났다.
바지 속 지폐를 발견하는 일이야 세탁을 자주 하는 내게 오는 팁이 되어주니 그 다름 또한 반가운 일일지 모르지만, 서로에게 불편함을 주는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식사 후 싱크대에 설거지가 쌓여있는 것이 싫은 나와 밥을 먹은 후에는 잠시 소화를 시킬 겸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남편은 설거지 타이밍또한 다르다.
주로 식사 준비를 내가 담당하고 있어 설거지는 의례 남편이 하는 것으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다.
남편이 설거지를 할 타이밍을 미루게 되면 나는 그걸 계속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데 성질이 급한 걸로 치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성미에 답답함은 더 이상 밀어 넣을 곳이 없이 꽉 들어찬 쓰레기봉투처럼 포화상태가 된다.
싱크대를 지나 거실로 향해 있어도 뒤통수에 달린 눈은 연신 싱크대 위 그릇들로 온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적당한 타이밍에 나서 주면 좋으련만 남편은 늘 내가 속이타 못 이겨 일어났을 때 본인이 하겠노라며 몸을 일으킨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제때 해주면 얼마나 좋아?'
아마도 평생 이 부분에 대한 합의는 이루에 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각자의 다름의 시간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 이상 한 몸이 아닌 그가 어찌 내 마음에 쏙 들 수가 있을까.
이미 10년을 넘게 덜어내고 이해하며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이만하면 그럭저럭 맞추고 있는 중이리라 스스로 위안하며 그 순간순간을 내려놓으며 살아가면 그뿐.
서로의 다름을 안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필수가 되는 과정일 것이다. 다름을 알고 서로가 좋고 싫어하는 부분을 머릿속 체크리스트에 소상히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부부가 신혼 때 가장 꼭 치러내야 하는 통과의례일 것이다.
신혼 때 그 체크리스트를 채우지 못하면 과제를 끝내지 못한 학생처럼 몇 년간은 계속돼야 할 일이 되고 만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부부에게는 용기 있게 싸움에 맞서 서로를 치열하게 알아가는 일이 미뤄진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밀린 숙제를 하고 있는 중이다.
방과 후 나머지 공부를 치열하게 하다 보면 내년 이맘때쯤에는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까.
구부정한 자세로 후루룩 그릇을 헹궈내는 남편의 재빠른 손놀림이 내 속도 모르고 오늘따라 유난히 낭창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