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아이 없이 사는 내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 부부가 아이가 없이 살기로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남편과 나는 각자 다른 아픔이 존재한다.
이혼과 재혼을 겪은 가정에서 자란 남편은 어릴 적 지독히도 가난했고, 무심한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인색했다.
남편은 삼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책임감을 강요받고 자랐다.
다섯 살 때부터 일터에 나간 아버지와 할머니를 대신해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자리했다.
자연히 가족이란 울타리는 편안함을 주는 안식처라기에는 두 어깨가 무거워지는 책임감으로 지어야 하는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의 유년시절은 남편에 비하면 매우 유복했고, 더없이 풍족했다.
세 딸 중 막내인 나는 우리 집에서는 태어난 후에 집안일이 모두 잘 풀렸다며 재물운을 가지고 태어난 복덩이로 불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재물을 가져온 아이라는 프레임으로 자연스레 집안 분위기는 늘 밝은 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의 보증 빚과 함께 모든 것이 달라지기 전까지는.
한창 예민해질 사춘기에 나는 여러 변화를 무방비생태로 맞닥뜨렸다.
집의 부동산과 동산, 가전제품은 모두 빨간딱지가 붙거나 경매로 넘어갔고 1년에 한 번 꼴로 더 나쁜 환경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
그 후로 내 나이가 서른이 되기까지 무려 17년간 열일곱 번의 이사 이력을 남긴 주민등록등본을 만들게 되었다.
어디 이사뿐일까.
우리 세대에는 찾아보기 힘들법한 일인데 수학여행비를 낼 형편이 되지 않아 고등학교 3학년 수학여행을 거른 적이 있었고, 참고서를 살 여력이 되지 않았던 적도, 미술 전공자임에도 입시준비로 화실에 다녀본 적도 없다.
내게 가족은 위로이자 의지가 되었지만 돈 없이 자식을 사랑으로만은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배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부모님의 사랑과 경제적인 여견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 수 있었으니까.
나는 결혼 전부터 남편에게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뜻을 선전포고하듯 했다. 2세를 꿈꾸는 사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 었을지 모르지만 남편은 달랐다. 그는 비혼주의자에 아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남편을 끌어당긴 것이었을까.
남편 또한 아이를 원지 않았기에 우리는 결혼했고, 지금까지 13년간 아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결혼생활 중 중간중간 아이가 필요한지에 대해 화두를 던졌지만 나보다 남편이 더욱 시니컬한 반응이었고, 나 또한 그의 반응을 회유할 만큼 아이를 갖는 데에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나를 아끼는 주변 지인들은 행여나 나이가 들어 우리 부부가 후회를 하게 될까 걱정을 하곤 한다.
'나이 들면 자식 보고 산다더라'
'나이 들어 갖고 싶을 때는 갖기 어려우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생각을 바꿔라'
하며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미리 걱정을 쌓아두는 얘기를 하곤 한다.
그렇지만 그역시도 나의 딩크 삶을 그만둘 만큼 구미가 당기는 얘기는 아직까지 없었다.
혹시나 아쉬움이 남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13년 전 우리 부부의 신혼 때는 가난했고 서로를 책임지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신혼때와는 다른 여유로운 삶을 살고는 있지만 아이를 갖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출산을 결심한다 해도 아이에게 늙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합리적, 이성적, 감정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나의 최선은 미래의 아이가 올 자리가 없다.
13년 전 그때도 아니었고 지금은 더더욱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가끔 나와 남편이 딩크를 선택하게 된 뿌리 깊은 마음이, 그 결핍이 떠오를 때면 가슴 한 편이 아리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