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 그리고 우리

결혼, 그리고 새로운 시작

by 리븐제이

한국에 돌아와서는 바쁘게 지냈다.

50명 남짓한 직원들 앞에서 본격적인 디자이너 승급시험을 치르고 데뷔했다.

처음엔 꿈을 이뤘다는 쾌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런던에 가기 전 이미 모델작업을 했던 터라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어렵진 않았지만

하면 할수록 나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진정 나는 이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까?


무엇이든 처음은 낯설고 어렵지만 또 기대하는 마음도 갖게 한다.

한국에서 디자이너 명찰을 달고 고객님을 만나는 일은 떨림과 동시에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이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이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비단 모든 일들이 그럴 것이다.

하나를 알면 두 개가 따라오고 그 두 개를 할 수 있게 되면 또 다른 일이 주어지리라.

하면 할수록 재미있으면서도 어렵고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경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남과 비교하고 의식하는 일상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는데 매 달 말일이 되면 매출 그래프를 비교하는 영업회의는

달갑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로의 목표를 북돋아주고 응원해 주는 회의라면 분명 달가웠겠지만.-

물론 동기부여를 위한 회의였겠지만 긍정적인 말들보다는 주로 부정적인 말들이 오가며

힘을 빼놓았다.

그렇게 나는 점점 지쳐갔고 내 꿈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한 사람을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아름답게 해주는 나의 직업이 매출과 경쟁으로 점철되었다.

점점 스트레스가 쌓여갔고 몸은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국에 다녀온 지 3개월도 안 되어서 나는 허리디스크로 인해

한 달의 길고도 짧은 병가를 얻게 되었다.

이제 막 디자이너가 되어 한창 날아다닐 시기에 아파 몸져누워있다니.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려왔을까.

한 달 동안 병원 치료를 하는 와중에 그때 당시 대표님이었던 분의 전화를 나는 잊을 수 없다.


"네가 아파서 들어가는 바람에 너의 후배 00 이가 손님 다 뺏어가고 매출을 치고 올라갔어.

나는 너한테 많이 기대했었는데 너무 아쉽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나의 건강과 안부는 궁금하지도 않았을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이런 대표 밑에선 일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실망감과 분노에 가득 차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저 돈돈돈.

돈만 밝히는 오너 밑에서 과연 내가 뭘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성장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러갔고 그렇게 나는 복귀하게 되었다.

복귀할 때 나의 마음가짐은 이러했다.


'나만 생각하자. 돈 많이 벌면 좋고 매출 많이 하면 좋지. 그렇지만 난 내 건강이 우선이다.

일단 여기서 경력 쌓는다고 생각하고 좋은 부분만 흡수하자!'


그렇게 나의 이십 대를 보냈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치열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리고 그 당시 난 X와 몰래 사내연애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만 빼고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사랑의 힘으로 지켜낼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29살이 되던 해. 우리는 결혼을 했다.

결혼준비는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갔었다.

물 흐르듯이 양가 부모님과 만나 상견례를 하며 날짜를 잡고 의례적으로 결혼식을 잘 치렀다.

그리고 우린 고민 끝에 함께 다니던 매장에서 해방되기로 결심했다.

무슨 일이든 함께 하기로 했다.

우리의 이름을 걸고 매장을 오픈하기로 한 것.


가족 간에 같이 일 하는 거 아니다.

뭐 배우는 거 아니다.

말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함께 할 날들을 상상하며.

온 신경을 새로운 매장에 집중하며.

앞으론 우리 행복한 날들만 가득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나의 감각을 총 동원해 모든 걸 갈아 넣었던 애증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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