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내리는 시간

파주 헤이리마을에서의 1박 2일

by 리븐제이

한창 더운 8월 초 휴가철부터 시작해 사람들이 바람 쐬러 일본이나 제주도로 여행을 많이 가던 시기에

나는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스멀스멀 억울한 마음이 일렁거렸다.

'열심히 일 한 자 떠나도 되지 않나?'

하지만 11월 초에 10일 정도 휴가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양심 있게 행동하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것도 잠시.

바람이라도 쐐러 가볼까 싶은 마음은 도저히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가까운 곳으로 짧게라도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약 한 달 전 파주에 있는 '모티프원'을 예약했고 어느덧 그날이 다가왔다.

파주 가는 김에 들리고 싶었던 곳을 지도에 체크해 놓고 출발 당일 아침 짐을 챙겼고

나름 장거리 운전을 하는 날이라 바짝 긴장했다.

커피와 달달한 음료가 무척 당길 만큼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모든 잎들이 다른 색의 옷으로 갈아입으려 준비 중이었다.

가까운 커피전문점 드라이브스루에 들러 홍차를 텀블러에 담아 피크닉 가는 기분을

만끽했다.

본격적으로 정체가 시작되기 전인 평일 낮에 출발해서 그런지 도로는 비교적 한산했다.

체크인이 오후 3시라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일부러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해 온 나를

스스로 칭찬했다.


초행길을 가는 건 언제나 두렵고 긴장된다.

내비게이션도 잘 봐야 하고 주변도 봐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어느덧 서부간선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내가 뉴스에서만 보던 서부간선도로 위에 있다니!'

놀랍고 신기했다.

장롱면허에서 초보운전 스티커 떼고 운전경력 나름 4년 차인데 아직 못 가본 곳들이 많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왔다 갔다 출퇴근과 아주 가끔 근교로 드라이브 가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2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는 보통 국내 여행을 갈 때이므로 충분히 마음먹고 가야 한다.


긴장도 잠시.

점점 마음이 편해지고 햇살이 눈부셔 선글라스를 꼈다.

흥이 올랐다.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느덧 성산대교북단을 지나고 있었다.

'어머! 내가 좋아하는 한강 위를 직접 운전해서 달리고 있다니!'

잠깐 차가 밀리는 듯했지만 이내 강변북로에 들어서니 다시 원활해졌다.

파주에 다다를 때쯤 달리는 자유로는 너무 아름다웠다.

바깥 풍경이 점점 바뀌더니 높은 건물 하나 없이 가로수가 길게 늘어져있었다.

눈에 마음껏 담고 싶었지만 운전에 더 집중해야 했으므로

이 날은 내가 조수석에 앉아 마음껏 풍경을 즐기며 경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헤이리 마을에 도착.

노란 현관문이 나를 반겨준다.

호스트에게 간단히 설명을 듣고 방을 안내받았다.

1박 2일이지만 여행 때마다 항상 챙기는 물건들과 노트북까지 있어 무거웠다.

얼른 짐을 내려놓고 공간을 둘러보았다.

어쩜 햇살이 그렇게 나를 반겨주던지.

자연 채광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이 공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책 또한 인테리어로 자리 잡고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보통 다녀간 사람들의 리뷰를 봤을 때 글을 쓰거나 독서하고 싶을 때 혹은 속세에서 벗어나 서울 근교 가까이에서 잠깐의 쉼을 허락하고 싶을 때 방문하는 듯했다.

나 또한 노트북을 챙겨 온 이유이기도 했다.

앉아서 내리 글만 쓰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와 다르게 어느덧 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 나.

날씨가 너무 좋아 산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체크인하며 받은 프리쿠폰이 있었는데 거기에 적힌 내용은 이러했다.

‘잃어버린 감수성을 찾아 줄 파주 헤이리마을... 등등’

이미 감수성 넘쳐흐르는 사람 여기 있습니다만.




구석구석을 다 누비진 못했지만 대충 둘러만 봐도 느낌이 왔다.

'내가 오늘 하루종일 앉아서 글을 쓰긴 글렀다.'

도저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는 날이니까.

특히 나는 어딜 가든 날씨요정과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데 역시나였다.

이왕 나온 거 근처 가고 싶었던 곳도 가보기로 했다.

해가 지기 전에 가서 일몰을 볼까 다음 날 체크아웃하고 낮에 들를까 5초 정도 고민했지만

날씨를 봐서는 일몰이 기가 막힐 것으로 예상하고 목적지를 향해 내비게이션을 눌렀다.


그날 방문한 곳은 '콩치노콩크리트'라는 온전히 음악감상을 위한 공간이었다.

생수를 제공해 주시고 그 외의 음료 반입은 일절 안된다.

가방에 책 한 권을 들고 갔기에 음악을 들으며 독서할 요량이었다.

막상 들어선 공간은 웅장했다.

층고가 어마어마하게 높았고 음질도 무척 좋았다.

진작 봐둔 자리가 있어 3층으로 향했다.

이미 명당이라고 소문난 자리는 꽉 차있었다.

더 재빠르신 분들이 많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책을 펼치긴커녕 나는 이곳저곳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사진을 찍기 바빴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를 사랑하는 사람, 여기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왔다.

온전히 공간을 즐기고 음악을 즐기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고 남기고 싶기에

여러 번 카메라 어플을 켜고 또 켰다.

감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나는 그제야 가져온 책을 펼쳤다.




여러모로 처음인 순간이 많았던 날이다.

여전히 아직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고자 다짐했다.

충분히 즐기고 충분히 만끽하자고.

비록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했지만 또 그러면 어떠한가.

새로운 경험들이 채워져 마음이 그득해졌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공간에서 마주한 땅거미 지는 시간은 무척 아름다웠다.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다른 생각을 할 사람들의 마음이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약간의 쉼 그리고 글쓰기를 할 생각으로 떠나온 파주에서

여전히 쉬지 못했고 바쁘게 움직인 하루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풍광에 집중했다.

언젠가는 또 희미해질 찰나의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나는 또 카메라 어플을 켰고 깜깜해지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