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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성인 Mar 29. 2016

여섯째날. 맥주 한 잔의 행복, 뮌헨.

2016년 2월 25일 프라하 -> 뮌헨

여섯째날

2016년 2월 25일 목요일 - 1



누군가가 나를 건드려 깨운다.

"패스포트 플리즈"

눈을 비비고 보니 경찰이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하는 여권 검사. 여권을 꺼내 보여주고 나니 도로 눈이 스스르 감긴다. 프라하에서의 꿈결같은 이틀이 지나가고 나는 뮌헨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프라하에 갈 때보다 더 설레고 떨린다. 프라하에게서는 처음 만나는 설렘이 먼저였다면 뮌헨에게는 왠지 "그동안 잘 지냈어?" 하고 서먹한 인사를 건네야 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뮌헨의 얼굴에 나도 그간 너 못지 않게 잘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마저 조금 느껴졌다. 반갑지만, 또 막상 보면 여러 생각이 떠올라 편한 수다만을 떨수는 없는 얼굴이 나의 뮌헨이다.


(좌: 유로라인버스 / 우: 도착지인 뮌헨 학커브뤼케 버스 정류장)



뮌헨의 품에서 보냈던 나의 삶과 

나의 과오와 

나의 소소한 즐거움. 

나의 추억과 

나의 야무진, 그러나 저만치 멀리 있었던 

나의 푸른 구름이 

때로는 햇살과 

때로는 먹빛 하늘을 배경으로

가만히 떠올라온다. 

내 다리는 쉬고 

내 눈은 감았지만 

뮌헨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뭔가 분주하다.


뮌헨 마리엔플라츠 역에서



그래서였을까. 나는 뮌헨에서의 일정을 애초에 단순하게 생각했다. 뭘 보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내게 가장 익숙한 뮌헨은 아내와 친구들을 위한 쇼핑 장소였고 동생들의 도움을 받으면 악보 찾는 일도 수월할 것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이어나가던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하고, 그런 모습이 사실은 바깥으로 다 드러났을텐데도 

혼자서만, 절대로 아무도 그 모습을 모를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도 스스로 믿기지 않아 불안해 하던

그 시절의 나를 찾아내어 

다시 한 번 안아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무심결에 지나온 그 팍팍한 시간 속에도 

사랑과 온기와 호의와 감동이 

넉넉하고 촉촉하게 깃들어 있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순례였다.


(좌: 세중이가 해 준 볶음밥 / 우: 유학생 시절 가끔 먹었던 뮌헨 올림피아 쇼핑센터 내 에밀리아 피자)


세중이가 집을 내 주었다. 약소하지만 선물로 가져온 진짬뽕을 안겨준다. 올림피아 쇼핑센터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짐을 풀고 보니 별의별 기억들이 다 떠오른다. 금주의 세일 찌라시를 엄숙하게 정독하고 내 등판만한 백팩을 닌자거북이처럼 메고 몇 천원도 안 되는 피자 한 조각도 여러 번의 심사숙고 끝에 사 먹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렇게 살지 않았어도 괜찮았을텐데 싶지만 막상 또 그 때로 시간을 되돌린다면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자신감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예전에 늘상 다니던 올림피아 쇼핑센터도 반갑고 변화가 적은 독일의 여전한 모습도 보기 좋다. 세중이가 해 주는 볶음밥을 먹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금방 시간이 가 버린다. 


뮌헨의 달마이어 매장 (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좌/우는  http://www.brainstormclub.net 에서, 중은 http://www.kapsel-kaffee.net/에서)


나는 피아니스트인 강운이를 만나 잠시 시내에 있는 달마이어에 들린다. 달마이어는 원래 바이에른 왕실에 식료품과 기호품을 공급하던 곳인데 지금도 고급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 슈퍼마켓이다. 한국에도 들어와 있는 달마이어 커피가 바로 이곳의 커피이다. 이 곳에서 친구들과 아내를 위한 바이스부어스트 깡통을 사고 달마이어에서 제휴해서 만든 듯한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도 샀다. (네스프레소 캡슐보다 싸지만 맛이 아주 훌륭하다.)

숱하게 밥 같이 먹고 우리집에 와서 곧잘 뭉개던 강운이가 짐도 들어주고 말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통에 조금 시내를 걸어다녔을 뿐인데 벌써 해가 진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낯섦을 기본으로 하는 여행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익숙함으로 뒤바뀐 것 같았다.



이 날 마지막 시험이 끝난 세중이가 곧 합류했다. 나와 강운이와 세중이는 한 그리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뮌헨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브루스코라는 곳이었는데, 분위기도 음식도 모두 좋았다. 맥주가 바이엔슈테파너인것만 조금 아쉬웠을 뿐이다. 나는 양고기 학센(정강이뼈 부분)을 시켰다. 돼지 학센처럼 맥주에 바삭하게 구워낸 것은 아니고 마치 아이스바인처럼 삶은 요리였는데, 


그리스식 양 학센 요리 (양의 정강이뼈 부분을 허브와 삶아 냄.)

(좌: 돼지고기 꼬치 요리 / 우: 속을 채운 깔라마리 요리)


맛있다! 요리를 잘 해서 그런지 양고기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육질이 아주 부드럽고 고기도 육즙을 한껏 머금어 만족스럽다. 세중이는 속을 채운 깔라마리(작은 오징어)를 시켰는데 이것도 나름대로 맛있었다. 메뉴판의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치 한치처럼 얇은 깔라마리는 무척 고소했고 올리브 기름의 풍미와 염소치즈가 다른 내용물들까지 맛깔나게 살려주고 있었다. 강운이가 시킨 것은 돼지고기를 꼬치로 만들어 구운 것이었는데 내 입맛에는 조금 평범했지만 그래도 각종 허브를 이용해 느끼하지 않고 약간 퍽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씹히는 맛이 괜찮았다. 독일의 자존심 감자 또한 훌륭했다. 양고기에 깔라마리에 돼지고기. 먹다 보니 은근히 괜찮은 조합이다.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하다보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내가 뮌헨을 떠나올때가 이미 5년전이고 뮌헨에 처음 왔을 때가 9년전이다. 그 때는 세중이도 강운이도 애티를 못 벗은 20대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나름 어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 어쨌거나 반가운 얼굴이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에게 기분 좋게 저녁을 샀다. 괜시리 흐뭇한 저녁이다.




8시 10분전에 슈퍼에 들러 나는 맥주를 고르는 소소한 행복을 다시 맛본다. 뮌헨 맥주의 상징이자 뮌헨 시민의 70퍼센트가 절대 지지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너 에델슈토프와 (아아! 네가 정말 그리웠어!!) 안덱스의 도펠복 (알콜 도수가 높은 수도원 맥주 - 맥즙의 향이 최고인 달달한 맥주 - 복비어 중에서는 따라갈 자가 없다.)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의 테건제 슈페치알 (이 맥주도 무척 조화롭고 목넘김이 우아하여 생각 많이 났던 맥주이다.) 을 한 병씩 집어든다. 모두 한국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맥주이다. 이 맥주들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참 좋을텐데. 내일은 꼭 아우구스티너를 생맥으로 마시리라 다짐한다.


뮌헨의 첫 밤. 맥주가 들어가고 나니 분주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하다. 삶이란 그냥 이런 것일까. 사소한 기쁨을 그때 그때 빼앗기지 않는 것. 어쩌면 여행이 아닌 하루하루의 삶에서 그런 행복을 지킬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늘 맥주를 마시면서 하나님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 날은 왜 그렇게 그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는 말씀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오늘의 행복을

오늘의 사소한 기쁨을 놓치지 말자.

내 과거를 보듬어주려고 왔다가 

내 오늘이 꽤나 행복하다는 걸 발견한 

소중한 하루. 

잠들기가 왠지 아까워

한 병을 더 깐다. 

술 따라지는 소리는 경쾌하고 

그 빛깔은 여어쁜 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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