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벨베데레 상궁
그림을 보다 보면 그 앞에 몇시간이고 서 있고 싶은 그림을 만나게 되는데 나에게는 뮌헨 알테 피나코텍의
뒤러 자화상과 렘브란트의 젊은 여인과 있는 자화상이 그랬었다. 정말 그 그림들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내 발걸음을 붙잡아둔다. 이 곳에도 이름난 그림들이 많이 있다. 고흐의 오베르의 평원, 들라크루아의 정물, 그밖에도 뭉크와 모네, 마네 등의 작품이 눈에 띈다.
귀스타브 꾸르베의 작품도 있다. "사실주의의 핵심은 모든 이상화를 배격하는 데 있다." 라는 문구와 함께. 재미있게도 주위의 부부들을 보면 다들 한 편은 사실주의자를 맡고 다른 한 편은 낭만주의자를 맡아 살고 있는 듯 하다. 우리 부부도 그렇다. 나의 현명하고도 무서운(!) 마누라 또한 나의 이상화 경향을 철저히 배격한다.
클림트의 꽃그림들도 인상적이다. 그 가운데 마치 꽃얼굴을 하고 초록 잎의 드레스를 입고 직립한 것 같은 해바라기도 있다. 그 구도는 거의 인물화와 다르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꽃은 사람에 관한 비유다. 더없이 소중한 덧없음에 대한 비유다. 클림트 역시 한낱 풀뙈기요 오늘 피었다가 내일 지는 무상성 위에다 사람의 얼굴을 입히고 싶었을까?
쉴레의 지독히도 어두운 해바라기도 눈길을 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불굴의 광채라면, 쉴레의 해바라기는 현실이라는 석회질을 마시고 빛을 잃어버린 광채이다. 그에게는 우러를 태양이 제 안에도 제 밖에도 없다. 그런데도 이 그림이 다른 이들의 우러름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환한 얼굴이든 슬픈 얼굴이든 모든 얼굴에는 마주할 얼굴을 찾고 싶어하는 갈급한 심령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상궁에서는 또 한편의 반가운 그림을 만났다. 빈 필하모니를 그린 오펜하이머의 작품이다. 그 지휘자는 다름 아닌 구스타프 말러. 그는 음악이라는 회오리 바람의 중심에 서서 나무와 금속과 숨의 소용돌이를 저 하늘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이 그림은 루벤스 류의 장대한 신화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카툰을 연상시키는 인물들의 표정은 저 우주 같은 심포니의 울림 속에서도 결국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서 저 괴물 독재자 같은 지휘자의 지랄발광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고생스러운 저 얼굴들. 음악의 광휘와 무관하게 혹독한 시달림을 겪었을 저 얼굴들. 그래서인지 모든 연주장에서 울려퍼지는 박수소리에는 "정말 모두들 고생 많았어" 라는 의미가 늘 들어 있다. (듣는 이들의 고생을 포함해서 말이다)
드디어 클림트의 명작들이 놓인 방에 들어간다. 방의 양쪽 끝 벽에 유디트와 키스가 있다. 과연 유디트는 무시무시하고도 설레는 작품이다. 황금빛은 광채라기보다는 무거운 금속이다. 물질적인 질감이 강조되어 시선이 갇힌다. 이 금속과 대비를 이루는 색은 검정이다. 검정은 무채색이지만 여기서는 사람의 머리칼 색이기 때문에 금속과 대비된다. 금속과 다른 질감의 이 무채색은 유디트가 입고 있는 망사옷에서도 언뜻 활용된다. 결국 이 검정은 섬유의 질감이라는 점으로도 황금과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금속에 막힌 시선은 망사의 흘러내리는 선을 따라 이동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뒤로는 유디트의 젖가슴이 드러나 있다. 숱하게 많은 누드화가 있지만
이 그림이 에로틱한 이유는 바로 시선의 흐름 때문이다. 갑옷을 벗기고 나온 여전사의 보드라운 육체가 그 대비효과로 인해 여성성을 훨씬 배가시키는 것이다.
유디트의 몸을 따라 시선을 오른편 아래로 하면 또다른 검정을 만나게 된다. 참수당한 적장의 머리. 여기서 검정, 즉 머리칼은 생명도 죽음도 아닌, 애매한 중간쯤에 놓여 있다. 반죽음 혹은 반생명의 상태라고나 할까? 그러고서 유디트의 가늘게 뜬 눈과 야릇한 황홀경의 표정을 바라본다면 전체 그림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유디트의 피부는 다른 클림트의 여인들처럼 투명하거나 말갛지 않다. 주변의 검정과 둔중한 황금이 어둔 빛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죽음의 암시에도 유디트는 더없이 에로틱하다. 알면서도 죽음으로 뛰어들만큼의 흡입력이다. 마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클림트의 키스에 대해서는 간단히 적는다. 남자의 황금색 외투는 포옹하는 두 사람 모두를 한데 감싸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진정한 사랑의 그림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는 두 사람의 포옹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거의 한 몸으로 보이는 그녀의 발끝이 그의 황금빛 외투로부터 슬쩍 빠져 나와 있는 그 지점 때문이다. 여기서 그림은 폐쇄성을 벗어나 자유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자유의 가능성이 없는 사랑은 곧 속박이기에. 무릎 꿇은 그녀의 두발은 시선을 바깥으로 이끈다. 연합되었으나 동시에 자유가 있는 두 남녀의 모습. 그래서 이 그림은 클림트 그림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것이 아닐까?
오래간만에 그림이 나를 붙들어 세운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표현처럼 좋은 그림은 내가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 그림이 나를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형과 색과 빛으로 "내 삶의 황량함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런 그림을 만날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겸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