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기도 그리고 꽃
그것은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서른이 다가옴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대의 마지막 가을의 입구쯤 이였다. 어디로든 떠나야 했고 무엇이든 해야 했다. 20대의 마지막을 그렇게 허망하게 일만 하면서 노동자의 20대로 갑을병 중에서도 병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일을 그만두고 일본행 비행기에 내 마지막 20대의 주사위를 던졌다.
도쿄에서의 이튿날 나는 메이지신궁 입구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게 나는 딱히 믿는 종교도 없으면서 부산여행을 갔을 때는 범어사를 항상 갔으며 서울에 가면 명동성당을 빼먹지 않고 잘도 간다. 절에 가면 숲을 거릴고 한참을 불상 앞에서 절을 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본다. 성당에 가면 또 어떤가 뒤쪽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가대의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다시금 첫 해외여행을 와서 나는 도쿄의 메이지신궁을 찾았다. 무엇을 그렇게도 빌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나의 두발은 신궁의 입구를 걷고 있었다.
시간은 가을의 문턱이었으나 태양은 이따금 여름의 태양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입구부터 길게 줄 서 있는 나무들은 태양을 가리고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에게 편히 가라고 배려의 말을 건네듯이 바람결에 나무들은 소리를 내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가는 아이의 웃음소리,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는 새들의 노래, 손을 잡고 걷다 서로를 바라보며 셀카를 찍는 커플의 모습을 보며 잠시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하였으나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에 고마울 뿐이었고 신궁까지 가는 내내 첫 소풍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기분이 좋았다.
도착한 신궁에선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삼삼오오 모여 무엇인가를 구경한다. 나도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그 무리에 들어가 보았다. 운이 좋게도 그날은 일본의 전통혼례가 있던 날이었나 보다. 일본의 전통복장을 입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결혼식의 하객들이 신궁에 온 관람객들 앞을 천천히 지나간다. 관람객들은 저마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동영상을 촬영하기도 하며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다. 나도 말은 통하지 않겠지만 우리말로 속삭인다.
"축하해요. 행복하게 사시길요."
그들의 축복을 기도 했으니 이젠 나를 위해 기도를 해본다. 종이에 한글로 적힌 기도의 순서도 보고 옆사람의 기도하는 모습도 바라본다. 그렇게 한국에선 누가 시켜도 하지 않던 기도를 나는 이렇듯 타국의 사원에서 빌어본다.
메이지신궁을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신궁을 둘러보고 길에 빼곡히 줄 서 있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신궁을 빠져나가는 내 주위로 사람들은 계속 신궁에 기도를 하러 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목적 없이 그저 걸었다. 목적이 없으니 지도를 볼 필요도 없어서 휴대폰을 잠시 주머니에 넣고 도쿄의 거리를 우리 동네 마냥 걸었던 거 같다. 얼마를 걸었는지도 모르고 그곳이 어디쯤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프리마켓이 열린 거리에 도착해 있었다.
친절하게 웃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본어에 그냥 웃음으로 대답한다. 시음해보라고 건네는 시원한 음료에 목을 축이고 맛보라고 건네는 포도의 맛에 반해 숙소에서 게스트들과 함께 먹을 청포도 한 봉지를 산다. 청포도를 건네주며 상인은 나에게 고맙다고 한다. 건네받은 나 또한 이렇게 맛있는 포도를 나에게 건네주어 고맙다고 한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그 짧은 음절엔 긴 뜻이 담겨있었다.
한 손에 카메라 그리고 다른 손엔 청포도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행복은 별게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잊고 살아가는데 그 순간 그런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찬찬히 마켓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커피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엔틱 한 커피잔들을 눈여겨보고 빈티지한 안경들도 구경한다. 이렇게 사람의 취향을 저격하다니 이 프리마켓은 운명인가 라고 가장된 생각으 잠시 하며 웃어보기도 한다. 구경을 끝내고 출출해진 배를 쓰담 거리며 나가는 출구를 향해 발을 옮긴다.
꽃을 파는 할머니 두 분이 웃는 게 보인다. 꽃 속에서 두 분이 행복하게 웃으며 꽃을 매만지고 있는 게 보인다. 불현듯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생각났다
'무언가를 위해 줄을 서야 한다면, 꽃을 위해 줄을 서는 것이 가장 근사한 일일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북노마드- 어떤 날 5 > 중에서
나는 꽃을 구경하는 일본인 부부의 뒤에 서서 꽃을 본다. 그리고 두 분의 할머니를 본다.
두 분이 꽃처럼 향기롭고 꽃처럼 아름답다. 두 분이 꽃 같고 꽃이 두 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보며 할머니 한분이 웃으며 인사를 하시고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일본어를 못하는 나는 웃으며 일본어를 못한다고 사과한다. 그리곤 두 분처럼 고운 보라색 꽃이 있는 작은 꽃다발 하나를 사서는 앞으로도 꽃처럼 아름답게 사시라 나는 속으로 두 분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손이 모자란 나는 결국 이제 카메라를 끄고 가방에 넣어둔다. 오늘 카메라 너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했으니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며 감사인사를 한다.
그날 내 손엔 포도가 들어있는 비닐봉지와 주인을 닮아 고운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여행지에 와서 나는 다시금 여행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