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의 숨결

정말 그럴 때가

그럴 때 글을 씁니다

by 이은 Lien



<정말 그럴 때가>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 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살다 보니
정말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마음의 무게가 버거워
어디에라도 내려놓고 싶을 때

하고픈 말들이 넘쳐나
누구에게라도 쏟아내고 싶을 때

생각의 끝을 볼 수 없어
무엇이라도 끝을 보고 싶을 때

살아보니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끄적인 노트들이
들키고 싶지 않은 그때의 마음들이
꽁꽁 숨어있습니다.

노트의 무게보다
그 안에 적힌 글자의 무게가 무거워
나조차도 꺼내어보기 두려운 그때의 마음들이
꽁꽁 묶어져 있습니다.


*정말 그럴 때가, 이어령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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