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빼세요

선긋기의 철학

by 이은 Lien
<처음>

오선지 위에 나뭇잎 음표
초록의 설레임 노래
휘파람 화음 넣고
발걸음 리듬 넣어
라라라라라

by 이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펜드로잉 첫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로, 세로, 사선... 선만 보인다.


"그림의 기초는 선입니다. 오늘 수업은 선긋기예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얘들아, 글씨를 잘 쓰려면 손에 힘주어 선 긋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해. 종합장 꺼내 보세요."


한글 첫 시간에 하는 선긋기, 입학 후 아침 활동 시간마다 했던 그 선긋기부터 시작이란다. 당장 몇 개월만 배우면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시작했는데 하루 종일 선만 긋고 왔다.


그래, 이걸 잘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니까 해보자. 웬걸 힘들다. 초1 아이들이나 하는 아주 초급 단계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선 하나 긋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미안하다 얘들아. 이 어려운 걸 너희가 하고 있었구나.'


역시 사람은 자기가 겪어봐야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역지사지의 마음을 배우며 칭찬을 더 많이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선긋기에 몰입했다.


종이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숨에 쭉 선을 긋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잠깐 멈춰서도 안 되고 중간에 딴생각이라도 들면 금세 휘어지고 끝까지 닿지도 않는다. 같은 속도와 같은 필력으로 선 하나를 끝까지 쭉 긋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글에 간단한 내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펜 드로잉 수업 첫날, 나는 작가답게 선긋기의 숨은 철학을 떠올렸다.


"시작할 때만 보고 눈은 먼저 끝을 봐야 똑바로 그을 수 있어요. 끝을 알면 두렵지 않아요!"


강사님도 작가이신가? 하시는 말씀들이 모두 깨달음을 주는 말들이었다. '끝을 알면 두렵지 않다!' 막연한 두려움은 자신감을 잃게 만들지만 끝을 아는 두려움은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종이의 끝을 보고 나 자신을 믿으며 선을 긋는 순간 좀 더 반듯하게 좀 더 힘차게 그어진 선, 마법이 일어났다.


"회원님, 힘을 빼세요!"


반듯하게 꼼꼼하게 그어야 한다는 생각은 몸에 힘이 들어가게 했고 이미 내 손에는 쥐가 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귀신이다. 어떻게 알고 다가오신 건지 힘을 빼라고 하신다. 한숨 쉬고 힘을 빼자! 생각하며 다시 선 하나를 그었다. 힘을 빼려는 노력은 단숨에 여러 개의 선을 만들었고 삐뚤어져도 괜찮고 가늘어도 괜찮았다. 아이들 낙서하듯 쭉쭉 선 긋는 일이 하나의 놀이로 다가오며 즐거웠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너무 애쓰지 않아도 힘을 빼고 흐르는 대로 내 몸을 맡겨도 된다. 어쩌면 그것이 다음을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힘을 주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강사님, 오래 배우면 그림 실력이 느나요? 내다 팔 수 있을 정도의 작품이 나오나요?"


같이 등록한 회원이 물었다. 첫 시간부터 저런 질문을 하나 했는데 역시 강사님!


"꾸준히 하면 됩니다. 미술(美術)의 술(術)이 기술(技術)할 때 술(術)입니다. 기술은 연습량이 쌓이면 늘어요."


꾸준함과 연습은 나를 성장하게 한다. 어떤 일이든 꾸준히 연습하고 연습한 시간이 쌓이면 그만큼의 성장이 따른다는 것,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짚어주셨다. 그러기 위해선 숙제가 있어야 한다며 숙제 꾸러미도 주셨다.


선긋기 연습이 계속될수록 선을 그을 때 바로 위에 바로 옆에 그어진 선을 자꾸 의식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반듯하게 그려진 선이라도 있으면 그대로 줄 맞춰 따라 그리려 너무 의식한 나머지 두껍고 거친 선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겹쳐지는 선이 그려지기도 했다. 지금 나만의 속도와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히려 종이의 끝을 보고 내 속도를 찾아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나만의 잘 그어진 선이 만들어졌다. 우리 삶도 그렇다. 주변을 의식하며 나아가기보다 나의 목표를 보고 나의 속도에 맞춰 나아갈 때 나다운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A4용지를 가득 메우는 선을 들여다보며 반듯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틈이 보여도 괜찮았다.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아닐까? 살다 보면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고 모두 나인 것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작품인 것 아닐까?


"괜찮아. 오늘도 충분히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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