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미술관
제3부: 실향(失鄕)-폐허의 땅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발한 6.25 전쟁은 한국 사회의 혼란을 더욱 극대화했다. 전 국민 대다수가 가족과 재산을 잃는 민족사의 대비극을 남겼다. 월남 직후에 제주도, 부산, 대구 등지로 피난 온 화가들은 화구재료는 물론, 그간 그려온 그림과 재산, 심지어 가족까지 모두 잃은 채, 예술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거나 궁극의 목적이 되었다.
미술인들은 전쟁의 참상을 생경하게 기록하거나 폐허의 전경을 예술적 시선으로 그려내었다. 직접 목도한 전쟁의 광경이나 신문에 실린 보도사진을 참고하여 화폭에 재현한 사실주의 풍경화는 기록의 가치를 넘어 폐허와 재난의 내재한 숭고한 미학을 경험하게 한다. 어두운 색채와 거친 붓질, 형태의 해체나 분할로 고통의 기억을 화면 안에서 표출한 추상. 반추상의 풍경화는 전후 미술의 새로운 경향을 예고하였다. 이 시대의 예술 또한 과거의 비극을 품은 채 그리움의 정서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모색해 나갔다.
- 전시 해설 중에서
귀로(歸路)
귀로(歸路)의 개념은 1950년대 한국전쟁을 겪은 미술가들의 작업 속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로 재현되었고, '귀로(歸路)'의 의미는 단지 물리적인 귀향이 아니라, 일상으로의 복귀, 존재의 본질로의 회귀, 혹은 이상적 고향에 대한 회상과 같은 상징적 의미로도 확장되어 해석되었다고 한다.
서석규의 <귀로>는 전쟁의 상흔 속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 속에서의 고통을 담담히 그려낸다. 병들고 지친 이들이 웅크린 모습은, 귀향이 단지 회복이나 낭만이 아니라 절망의 또 다른 얼굴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남관과 이달주의 <귀로>는 생업을 마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 풍경을 통해 '귀로'를 고단한 노동과 삶의 반복적 순환으로 재해석한다. 천병근의 <귀향>에서는 고개를 떨군 인물들의 행렬이 물빛에 비치며 집단적 피로와 슬픔이 은유적으로 강조된다.
- 작품 해설 중에서
강운섭의 <유성이 있는 밤 하늘>은 폐허 속에서도 별빛만이 희망이었던 시대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종이에 크레용으로 그린 작품으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밤 하늘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전화황의 <전쟁의 낙오자> 속에는 낙오된 병사와 난리 통에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가 보인다. 모자를 눌러쓴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꿀꿀이죽을 들이마시려는 찰나 눈앞의 현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의지할 곳 없는 두 사람을 통해 전쟁의 비극과 참상이 느껴진다.
이수억의 <6.25 동란>은 피란 행렬의 고단함을 표현한 작품으로 인물들의 얼굴은 알 수 없을 정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에서 당시 힘들고 고달픈 피란민의 고충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전시실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어디를 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무표정이거나 단순화되어 있어 당시 피폐하고 고달픈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제4부: 망향(望鄕)-그리움의 땅
분단이 고착화되고 이산이 장기화되면서 고향은 희미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간다. 대신 그 자리에는 향토의 서정을 환기시키는 모티프들이 다시 등장하면서 고향의 모습은 현실경을 벗어나 원초적 낙원으로 회귀한다.
-전시 해설 중에서
윤중식(1913-2012)
고향의 하늘과 강, 들녘을 층층이 쌓은 '석양의 화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기억을 상징하는 소재로 석양, 섬, 강, 돛단배, 비둘기, 들판 등이 반복적으로 작품에 등장한다.
<봄>은 달빛 비치는 밤, 커다란 나뭇가지에 앉은 두 마리 비둘기를 중심으로 한 작품으로 비둘기는 고향집과 유년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나무와 사람, 마을, 해변, 바다 풍경이 단계적으로 배치된 <섬>은 '계단식 구도'라 불리는 윤중식 특유의 구성을 보여준다. 어두운 화면 속 주홍색 잎은 생명력을 상징하며, 섬은 갈 수 없는 고향을 은유한다. <고목>에서 붉게 표현된 고목은 생명의 기운을 드러내며, 마을의 수호신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 존재로 표현된다.
-작품 해설 중에서
전화황(1909-1996)
남과 북 그 어느 곳도 선택하지 못한 채 조국의 바깥에서 조국의 현실을 그린 재일교포 화가
<나의 생가>는 시골집 생가를 온난한 색조로 꿈속에서 추억하듯 아련하게 표현했다. 생가의 격자무늬 창살은 오랜 가옥을, 흰색과 회색 저고리는 가족을 상징하듯 추상적으로 간략히 묘사해, 어렴풋한 기억의 시골집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두 개의 태양>과 <춘향의 재회>에서는 만남을 주제로 조국 분단의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춘향의 재회>는 헤어진 남녀가 재회하듯 남북통일을 이루었으면 하는 희망을 담아 몽환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고 한다.
최영림(1916-1985)
흙과 모래를 캔버스에 바르고 유화 물감으로 그린 화가
<낙원>은 황토색 톤으로 흙과 땅을 연상시키며, 벌거벗은 인물들의 피부도 흙 질감처럼 표현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화면 곳곳의 파랑, 초록, 노랑, 주황 색채가 생명력과 생동감을 더한다. <소와 아이들>은 긴 화면에 누련 소와 아이들, 닭, 나비가 어우러져 노는 모습을 그렸다. 소는 농경 사회의 동반자이자 가족 같은 존재로, 순수한 아이들과 자연의 교감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자아낸다.
<봄동산>은 최영림의 말년작으로 화풍의 완숙미가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다. 꽃이 만발하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동산에서 아이를 업은 여인과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작가가 꿈꾸는 이상향을 구현하였다.
-작품 해설 중에서
전선택, <환향>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그림을 통해 고향으로 간다"라고 밝힌 것처럼 평생 고향에 대한 애틋함을 품고 실향의 감정을 담아 작품에 표현한 화가이다. <환향>에서 중앙의 두 백발노인은 남한으로 모시지 못하고 북에 남겨진 작가의 장인과 장모라고 한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가족과의 재회를 상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섭(1916-1956)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향토적 제재와 범자연적 모티프로 소, 닭, 게, 물고기, 아동, 가족, 풍경 등을 유화, 은지화, 엽서화 등으로 표현한 화가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 <통영풍경>, <나무와 까치가 있는 풍경>은 이중섭의 1953년 통영 체류 시기 작품들로서, 모두 근경의 나목과 먼산을 배치하고 이중섭 특유의 힘찬 선묘로 표현되었다.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은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가는 그리움과 설렘을 담았다면, <나무와 까치가 있는 풍경>은 까치가 새끼를 돌보는 모습을 통해 무능한 가장의 애절한 심정을 요약된 형상과 속필 선묘로 나타냈다.
-작품 해설 중에서
어두운 화면 속 주홍색 잎이 강렬했던 윤중식의 <고목>과 꽃이 만발하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동산에서 아이를 업은 여인과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최영림의 <봄동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표정이 없는 형태가 많았는데 최영림의 작품 속 인물은 표정을 가지고 있어 생명력을 더했다. 작품 속 아이들의 모습은 전쟁의 피폐함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되찾아주고 싶은 화가의 마음을 담아 표현한 듯했다. 강한 필선이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이중섭의 작품도 직접 볼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다.
<전시 정보>
-전시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 일정: ~11월 9일 (일)까지 화, 목, 금, 일요일 10:00~18:00 / 수, 토요일 10:00~21:00(덕수궁 정문 20시 입장 마감)
-관람료: 2000원(덕수궁 입장료 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