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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Apr 22. 2018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란 책을 읽었다. 이 책의 부제는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이다. 책의 주 저자는 열여섯에 성산업에 뛰어들어 현재 20대인 이소희 님과 그 밖의 공동저자(여성운동가 등) 7명이 더 있다.    

  

이 책은 페이스북 페이지에 우연히 뜬 한 소셜 펀딩 광고를 보고 구매해 읽게 됐다. 당시 봤던 책의 머리말은 과거 온라인상에 유행했던 페니미니스트 운동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앞서 일군의 넷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을 '창녀'로 취급하는 남성주의 사회에 '나는 창녀다'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자신의 경험담을 고백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부당하게 외모나 몸매를 평가당한 기억, 성추행 등을 당한 불쾌한 경험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운동의 저편에서는 또 다른 혐오가 생산되고 있었다. '나는 창녀다'라는 외침의 이면에는 나는 '창녀가 아니므로 나를 창녀처럼 대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었다. 그 말은 곧 '창녀는 부당한 취급을 당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잘못 읽히기도 했다. 여성운동의 한 흐름에서 조차 여성과  더 약한 여성(창녀)의 구분 짓기가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었다.      


해당 책 소개를 보고 나는 바로 책 구매를 신청했다. 두 달 정도 지나서 나는 책을 받아 봤고, 방금 전에 다 읽었다.      


책의 주 저자인 이소희 님은 성산업의 현장에서 겪었던 일을 가감 없이 담담하게, 혹은 발칙할 정도로 솔직하게 얘기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 조건만남으로 만나던 30대 변호사에게 콘돔을 빼고 성관계를 하자고 졸랐다가 거절당했던 적이 있다. 부잣집에 입양된 고양이처럼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꿨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그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남자 쪽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또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제처럼 성 산업의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고도 한다. 성매매를 단순히 불법이나 합법화의 문제로 단순화하는 것, 포주와 성판매 여성의 관계를 착취와 가해·피해자의 이분법으로 구별하는 것도 사건을 제대로 살펴 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성판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실장이라는 사람들은 '그녀들에게 돈을 더 많이 뜯어내기 위해서'라는 말을 겉으로 내세우면서 그녀들이 먹을 삼시 세끼를 꼭꼭 챙겨주며 그녀들이 아프면 걱정해주고 보호해 주기도 한다고 한다. 성판매라는 이상한 구조 속에서 실장과 아가씨들은 어쨌든 함께 밥을 먹는 식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나쁜 실장은 성판매 여성을 도구화하고 손님들의 불만이 접수됐다며 그녀를 테스트한다는 명목으로 강간에 가까운 성폭행을 하기도 한다.)      


깜짝 놀랄만한 현실의 모순도 이 이상한 판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듯 일어난다. 단속을 나온 경찰은 아가씨들에게 "남자와 어떤 체위로 했어?", "정액은 어디로 받았어?"와 같은 질문을 한다. 여성들을 무시하고 잘못을 훈계한다. 하지만 성구매 남성에게는 "재수가 없어서 걸리셨지만 이렇게 하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는 조언 같은 것을 건넨다. 단속 이후 일을 쉬고 있는 저자에게 실장이란 사람이 전화를 서 꼭 출근해줄 것을 부탁한다. 누군가 그녀를 지명해 방문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지명한 남자는 다름 아닌 요 전번에 단속을 나왔던 경찰이었다.      


책의 주 저자는 성판매 여성이라는 사회적 최약층이면서, 여성을 좋아하는 성소수자이기도 하다. 그녀에게는 여성을 서비스하는 것이 어려운 연기다. 그녀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워커를 신고, 몸에 문신도 새기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성 정체성을 따를 경우 그녀가 종사하는 업계에서 팔리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귀여운 여자와 같이 데이트를 하며 문도 열어주고 길 바깥쪽에서 걷고 싶다"고 고백하지만 오늘도 팔리기 위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화장을 해야 한다.       


그녀는 왜곡된 성판매 시장의 구조가 사회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이성애자 남성'의 집단 유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남성들이 대상화된 전형적인 여성을 정복하고, 서로 공유하면서 시스템에서 주류를 이루는 그들만의 연대를 공고히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룸이나 유흥업소 등에서 그녀가 남성들과 1대 1의 인간으로 대화를 하려고 시도하면 분위기가 싸해진다. 남성들은 단지 여성들을 관객으로 세워두고 "이 형님께서는 말이지...", 혹은 "내가 이래 봬도 정부 기관의 어쩌구..."하면서 자랑을 늘어놓을 뿐이다. 성판매 여성들 사이에서는 오죽하면 다섯 가지 말만 알면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고 한다. 그 다섯 가지 말은 '헐'. '진짜?", '맞아!', '대박', '화장실 좀.’이다      


성판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긴 의자를 떠올렸다. 지하철, 혹은 공원의 벤치에 있는 긴 의자 말이다. 그 벤치의 중간중간에는 칸을 나눠 놓은 것처럼 어떤 장애물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처음에 그 장애물이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칸을 나눠 놓기 위한 용도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배려'나 '편의'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벤치의 그 철 구조물은 집이 없는 노숙자들이 벤치를 혼자 차지하고 누워서 잘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다수가 쓰는 벤치를 노숙자가 전부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고, 노숙자가 누워서 잘 수 없게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차단'과 '금지' 혹은 '선긋기'를 뜻했다.       


이해는 할 수 있다. 시민의 세금으로 설치된 벤치를 시민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 말이다. 사회에서 떠밀려 난 노숙자가 벤치를 차지하고 있으면 미관상 좋지 않고 일반 시민 여러 명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장애물의 용도를 처음 알게 되고 나는 얼마간의 불편함과 안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임산부와 노약자가 힘이 든 것처럼 노숙자들도 힘이 든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일반 시민에게 피해를 주면서 벤치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벤치에 인공의 구조물을 박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노숙자들이 그 위에 눕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하는 것일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같이 행복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거나 적대시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거리에서 배고픈 고양이를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노숙자나 성판매 여성을 보거나 대할때 '더럽다'고 생각하는 대신 다른 식의 접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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