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닝포인트, 그 하나의 장면에 대하여
"한 가지만 더요. 아까 말한 세 개 말고, 지금 떠오르는 거 하나만 더 말해주세요."
을지로 3가 인쇄소 골목에 막 생긴 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식당, 그날 처음 본 소개팅녀와 나는 파스타와 리조또를 먹고 있었다. 방금 전 나는 상대에게 '이성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3가지'를 물었고 여기에 한 가지 답을 추가로 요구했다. 상대는 "진중하고 중심이 잡힌 사람이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진중하고 중심이 잡힌 사람인지 본격적인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진 이유를 설명했다.
"사람 심리가 보통 이성을 볼 때 중요한 3가지 조건을 물어보면 '착한 대답'을 한데요. 어느 정도 솔직하게 답하지만 상대가 들었을 때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그런 대답을 하는 거죠. 하지만 3가지 답을 하고 나서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물어보면 진짜 솔직한 대답이 그때 나온데요."
나보다 4살이 어린 그녀에게 나는 밝은 사람,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 손이 예쁜 사람이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가로 하나를 더 꼽자면 내가 상대를 생각하는 만큼 상대도 어느 정도 나를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 사람은 안 바뀐다고 믿어요. 나쁘게 말해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란 말, 맞는 것 같아요. 나로 인해 상대방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거, 커다란 오만 아닐까요. 작은 예로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거. 만약 둘이 정말 사랑하고 연애 초반이라면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사람도 밑에서부터 짤 수 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은 결국 치약을 다시 중간부터 짤 거예요. 만약 결혼을 할 거라면 상대방이 나로 인해 바뀔 수 있다고 믿지 말고, 평생 바뀌지 않을 그 사람의 단점들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게 중요한 거 같아요."
소개팅에서 말이 많아지면 그 소개팅은 100% 실패한다. 분명히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나는 오늘 처음 본 소개팅녀를 앞에 두고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중심이 잡힌 사람'을 설명하려다 너무 길게 돌아가 버린 것이다.
나는 바뀌지 않았다.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무리 5명과 여름을 앞둔 어느 날 술을 진탕 마신 새벽이었다. 1차, 2차를 마친 우리는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프링글스, 마른안주를 사 들고 본관 계단에 앉아 잔디밭을 내려다보며 다시 술을 마셨다. 갑자기 나는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서로의 단점, 상대에게 싫은 소리를 한마디씩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때 나는 서로 다른 친구에게 거의 같은 의미의 답을 들었다.
"너는 언제나 듣고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듣고 있지 않아."라는 말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사람의 마음에 대해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나였기에 그들의 말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같은 말을 듣고 있다.
"너는 주변 사람을 '풍경'으로 인식하는 것 같아." "너는 공감 능력이 떨어져." "네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 말고도 주변에도 좀 관심을 가져 줄 수 없니?"
정말이었다. 나는 본관 계단에서 같이 술을 먹었던 그 친구에게 "너 어디 산다고 그랬지?"라는 질문을 5번도 넘게 했었다. 내 딴에는 친한 친구니까 언제라도 필요하면 또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질문을 할 때는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답을 듣고는 금세 잊어버렸다.
녀석은 "여자 관련된 것만 기억하지 말고 친구도 좀 챙기지 그래."라고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럼 나는 "머리가 나빠서 어쩔 수 없이 ‘선택적 기억’을 하는 수밖에 없다구"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또 다른 친구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비슷한 불평의 말을 들었다. 그나마도 ‘내게 불평을 말하는 사람들은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다'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친구는 지금 나와 연락을 하고 있지 않다.
을지로 3가에서 만난 그녀와 헤어지고 집에 가며 안부 문자를 보냈다. 한참이 지나서야 짧은 답이 왔다. 나는 그녀가 술 중에 맥주를 좋아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다음에 가볍게 맥주나 한 잔 할까요?"라고 다시 카톡을 보냈다. 답이 없었다. 우리 둘은 카페에서 1시간, 길을 걸으며 잠깐, 식당에서 밥을 먹는 동안 총 3시간이 넘게 대화를 나눴다. 뭐가 잘 못된 걸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가 남자를 볼 때 뭐를 본다고 했더라. 3가지 중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사람은 안 바뀐다"라고 지루한 말을 이어가던 내 말을 인내심 있게 다 듣고는 "설령 사람의 본질은 바뀌지 않아도, 상대를 위해 배려하고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었다.
*소셜 살롱 다섯 번째 수업(2019. 05. 01) +네 번째 수업은 결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