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개기 일식

내 인생 가장 반짝였던 순간

by 거짓말의 거짓말

'어라, 여기 분명 전에 와 봤던 것 같은데.'


당시 나는 그게 '데자뷰'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전부터 가끔씩 그 묘한 느낌이 들 때면 신기하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퍽 나빠졌다. 여기는 분명 처음 와본 곳이고, 이 상황은 처음 겪는 것일 텐데 이미 내 기억 속에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는 '미래의 기억' 같은 그 느낌은, 어쩐지 내가 신에게 놀아나는 듯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세상에 유일하고 한 번뿐이어야 할 내 삶이 어쩌면 신이라는 작자의 설계대로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한 것 같아 배알이 꼴렸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무렵의 어느 여름날, 가로수 무성한 어느 갈림길에서 나는 그 기묘하고 나를 열 받게 하는 기시감을 또 느꼈다. 내 키보다 수십 배는 큰 가로수의 잎을 뚫고 반짝이는 햇볕이 내 눈꺼풀 위로 분탕질을 걸어왔다. 나는 문득 신에게 반항하고 싶어 졌다. 양쪽으로 난 길을 앞에 두고 나는 그 데자뷰 속에서 내가 왼쪽 길로 갔는지 오른쪽 길로 갔는지 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렴풋하게 데자뷰 속의 나는 오른쪽 길로 갔던 것 같았다. 나는 신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 '왼쪽 길로 가야지'라고 생각했다. 왼쪽으로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다시 또 한 번의 데자뷰가 찾아왔다. 그 데자뷰 속에서 나는 신에게 반항하기 위해 왼쪽 길로 가려고 하고 있었다. 신에게 반항하려 왼쪽 길로 가려고 했는데 신은 그보다 앞서 내가 반항할 걸 알고 있었다. 그 후 왼쪽, 오른쪽을 몇 번 더 바꿔봤지만 그때마다 나는 신이 설계한 데자뷰의 감옥에 갇혔다. 빌어먹을 신놈을 열몇 살짜리 코찌질이가 이길 수는 없었다.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50원인가 100원인가를 주고 산 막대 아이스크림을 아끼고 아껴서 핥아먹다가, 갈림길을 앞에 두고 깨물어 먹었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됐다. 수학 시간에 점, 선, 면에 대해 배웠다. 자연수와 유리수, 무리수를 모두 점으로 찍으면 선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점에는 길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점에는 길이가 없지만 점을 무수하게 찍으면 길이가 있는 선이 된다. 어쩌면 점으로 존재하는 현재라는 것도 길이가 없는 0, 허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와 미래에는 길이가 있지만 현재라는 점은 0, 그러니까 현재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지 않을까.


나이를 먹어 대학생이 됐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배웠다. 물론 이해한 것은 아니었고, 상대성 이론이라는 수박의 겉 꼭지 3분의 2 지점에 있는 검은 줄과 녹색 줄 2~3개를 핥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존재하는 것은 3차원의 공간이 아닌 4차원의 ‘시공간’이라는 것이었다. 1차원에 사는 점은 2차원의 면을 이해할 수 없고, 2차원의 면이 3차원의 부피를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3차원에 사는 나는 4차원을 볼 수 없다. 그리고 4차원의 세계 속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있을 뿐이다. 나는 볼 수 없지만 4차원의 세계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있다. 지금의 나는 미래로 순차적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모두가 단지 다른 공간에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어딘가에 있다. 가끔 그 경계가 모호해질 때 우리는 ‘미래의 기억’을 보게 된다.


지구로부터 3억 광년 떨어진 저 별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3억 광년의 시간을 지나 내 각막에 상이 맺혔을 뿐이다. 그 별은 내게 빛을 쏘고 2억 9999만 9999년 전에 폭발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도 어쩌면 진짜가 아닐지 모른다. 나는 당신을 보고 있지만 내가 보는 당신은 과거의 당신이다. 내 시신경을 떠난 빛 입자가 당신에게 닿았고, 당신에게 반사된 빛 입자가 내 눈에 도달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다. 다만 운이 좋아서 3억 광년이 아닌 아주 아주 아주 짧은 시간만큼만 떨어져 있을 뿐이다.


당신이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있을 확률은 지구와 달과 태양이 지금처럼 완벽하게 공전할 수 있을 만큼 기적적인 확률이다. 태양은 달 보다 400배 크고,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지구와 달의 거리의 정확히 400배다.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달이 정확하게 태양을 가릴 수 있는 것은 기적이다. 지구 상에 있는 그 어떤 과학자도 달이 어떻게 지금의 궤도에 놓이게 됐는지 모른다고 한다. 나는 과학자도 아니고 천문학자도 아니다. 다만, 나는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혹은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내 손과 당신의 손이 포개진다.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당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와 맞닿는다. 나의 지금과 당신의 지금이 만나 개기 일식이 생긴다.


*소셜 살롱 세 번째 수업(2019.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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