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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Jul 27. 2019

라면을 끓이며 by 김훈

작가의 말 

"나는 손의 힘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손은 자꾸만 남의 손을 잡으려 한다." 


16p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 시장기는 얼마나 많은 추억을 환기시키는가. 


30p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33p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4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71p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72p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너의 밥이 뒤엉켜 있다. 


90p

그들의 가난을 무소유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여기 와 보니, 무소유는 소유가 있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개념이었다. 


139p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핸드폰을 사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주었다. 첫 월급으로 사온 핸드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스러움이 겹쳐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지분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중략)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154p

6만 원은 유민이의 꿈을 위한 구매력에 쓰이지 못하고 바닷물에 젖어서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 300명이 넘게 죽었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몸이 물밑에 잠겨 있지만 나는 이 많은 죽음과 미귀(未歸)를 몰아서 한꺼번에 슬퍼할 수는 없고 각각의 죽음을 개별적으로 애도할 수밖에 없다. 


169p

생명의 아름다움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사람이 입을 벌려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지난해 4월 꽃보라 날리고 천지간에 생명의 함성이 퍼질 적에 갑자기 바다에 빠진 큰 배와 거기서 죽은 생명들을 기어코 기억하고 또 말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겨우 쓴다. 


178p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중략) 사내의 한 생애가 무언인고 하니, 일어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244p

여자들의 젖가슴을 놓고, 누구의 가슴이 더 예쁘고 누구의 가슴이 덜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열의 비교가 지금 이처럼 거대한 자본주의적 성형산업을 일으켜놓은 것일 테지만, 몸은 본래 그렇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여자들아, 당신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젖가슴의 삼각형 대칭구도나 젖꼭지의 방향을 따져보는 사내들을 애인으로 삼지 말라. 이런 녀석들은 대개가 쓰잘 데 없는 잡놈들인 것이다. 이런 남자들을 믿고 살다가는 한평생 몸의 감옥, 광고의 감옥, 여성성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247p

진보적 자유나 보수적 진실을 절규하는 신문 칼럼을 읽을 때가 아니라, 노출이 대담한 젊은 여자가 그의 젊은 애인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활보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안도감을 느낀다. 


267p

연필로 글을 쓰면 팔목과 어깨가 아프고, 빼고 지우고 다시 끼워 맞추는 일이 힘들다. 그러나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살아 있는 육체성의 느낌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276p

여자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내 바랑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서 이토록 헤매었다는 말인가 싶었다. 

살은 오직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나는 살의 아날로그를 자세히 쓸 힘이 없다. 그것은 아직도 내 언어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의 아날로그는 언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309p

그의 몸은 한평생 여름 햇볕과 소금에 절여져서 가까이 가면 햇볕 냄새가 난다. 살갗 밑에 햇볕이 늘 쌓여 있다. 


364p

하루종일 봄산의 언저리와 강가를 자전거로 쏘다니고 나면, 내 피부에 나무처럼 엽록소가 생겨서, 밥벌이에 수고하지 않고도 빛과 더불어 온전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각에 빠진다. 그때 숲속에서 오줌을 누면 초록색 오줌이 나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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