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잠들기 전에, 내가 만일 범죄를 저지른다면 무엇 때문일까 멍하니 생각한다. 내 경우 아마도 돈 때문은 아닐 것이고, 증오 때문도 아닐 것이다. 그 정도는 억제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쓸쓸해서 못 견디겠으면 어떨까. 자기도 모르게 일을 저질러버리게 되지 않을까?"
2001년 4월 1일 <에스콰이어>지와의 인터뷰에서 요시다 슈이치라는 일본 작가가 한 말이다. 이것을 읽고 그 이후에 표지에 '요시다 슈이치'라는 여섯글자가 보이면 안심이 된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겼다.
아래는 지금 읽고 있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퍼레이드>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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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선배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온 기와코와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마음이 끌렸다. 아마 이런 걸 두고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그것이 정말 세상 사람들이 첫눈에 반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그 사람 앞에 서면 까닭 없이 가슴이 설레고 빨리감기를 할 때의 비디오 화면처럼 안정감이 없어지고,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오버해서 받아들여, '산책이나 할까?'라는 상대의 말에 부랴부랴 집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 저 이제 결혼하게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긴장하는 거라면 나는 존경하는 선배의 여자에게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다.
43p
기와코는 선배를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날 밤, 두 사람만의 대화 중에 그녀의 입에서 얼마나 많은 '그 사람'이 나왔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기와코가 '그 사람이 말이야'라고 말할 때마다 나도 질세라 '우메사키 선배요' 하고 되받았다. 겨우 단 둘이서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연신 코를 곯아대는 선배 이야기만 했다. 우리가 앉은 3인용 소파의 한 가운데 우메사키 선배가 여전히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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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동안 내가 매일처럼 기억을 되새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은 어째서 그날 밤 기와코에게 아무런 의사표시도 못 했던가에 대한 후회 때문이다. 솔직히 그날 밤 나는 자신이 있었다. 기와코도 틀림없이 내 마음을 눈치 챘을 것이고, 거부할 의사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용기 없는 나는 아무런 의사표시도 못 한 채 우메사키 선배와의 대학시절 추억만 잔뜩 늘어놓고, 또 그녀와 선배의 연애담만을 묵묵히 들어주었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선배를 의식해서 절제한 건 아니었다. 그날 밤 분명 그녀의 입술에 운 좋게 키스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봐야 비참해지는 쪽은 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너무 쉽게 '좋아해요'라고 말해버리면 그야말로 내가 바람이나 피울 상대로 받아들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즈에서 돌아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이 두려워 머리 싸매고 고민만 할 뿐 전혀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요컨대 나는 기와코의 심심풀이 상대는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선배와 헤어져 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녀에 대한 사랑의 확증 같은 것도 없다. 단지 이대로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가 없을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겠다.
51p
"아, 그렇지. 아야코 씨에게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계산을 도우면서 그렇게 말하자 아야코 씨가 조금 귀찮은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뭔데?"
"저, 만약에 말입니다. 아야코 씨 애인이 있잖아요. 그 애인의 후배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떻게 하겠냐니, 뭘?"
"아뇨, 그러니까 뭐 귀찮다거나 기쁘다거나."
"그 후배란 사람이 근성이 있어?"
"근성……? 굳이 말하자면 없는 편일걸요."
"그럼 당연히 귀찮지."
"네?"
"근성 없는 사람한테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으면 귀찮다는 뜻이야."
55p
어젯밤 이미 이불 속에 누워 있는 고토의 베갯머리에 정좌하고, "실은 나, 아르바이트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매일 기와코의 맨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어"라고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고토는 꽤나 졸린 듯 보였지만 "어머, 그거 변태 아냐?" 하고 웬일로 진지하게 상대해주었다.
"역시 그렇게 생각해?"
"그 정도는 스스로 자각했어야지."
"어떤 자각?"
"그러니까 변태로서의……."
내게 변태로서의 자각을 갖게 해서 어떻게 할 생각인지. 어쨌든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 말이야.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 같아, 기와코를."
"사랑하는 거야? 사랑하는 것 같은 거야?"
고토는 이상한 부분에 연연했다.
"그러니까, '같다'는 건 수줍어서 그러는 거야" 하고 나는 대답했다.
"넌 단순한 것 같으면서 의외로 복잡해" 하고 고토가 말했다.
"내가 단순한 것 같아?"
"미라이나 나오키도 그렇게 말하더라. 그건 됐고, 어쨌든 맨션 근처만 어슬렁거리지 말고 제대로 현관 벨을 누르고 들어가서 진지하게 고백을 해봐."
"고백을 해?"
"그래, '난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같다'는 표현은 수줍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고."
"고백이라……. 아, 역시 무리다. 그래도 선배의 여자친구인데 어떻게."
내가 힘없이 중얼거리자 고토는 "그러면 얘기는 이미 끝난 거지, 뭐" 하고는 얼른 돌아누웠다.
62p
기와코와 함께 있으면 나는 아무래도 어린 남자답게 응석을 부리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스스로 생각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래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놈이라 아무리 변신하려 해봐야 뜻대로 되지도 않았다. 자신도 잘 알고는 있지만 그녀의 장난스런 거짓말에 속기라도 하면 그때처럼 엉겁결에 소파에서 일어서는 지난친 천진스러움을 계속 연출하게 되고 만다.
어쨌거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밤 나는 기와코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