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이야기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사건, 사람

by 거짓말의 거짓말

*재미를 위해 소설적 과장을 추가했습니다.


H와 나는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나왔다. 알고 지낸 기간은 길었지만 32살의 어느 날까지 녀석과는 큰 교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은 수년을 끌면서 "동네에서 술 한잔 하자"고 의례적인 인사말을 적어도 다섯 번은 건네고 무산되기를 반복하다, 우연히 시간이 맞아서 실제로 술을 한잔 한 날이었다.


녀석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학창 시절 조금은 유별났던 녀석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H는 무언가 하나에 꽂히면 무섭게 파고들었다. 고3 시절 수능을 앞두고 녀석은 "시중에 나온 모든 모의고사 문제집을 다 풀었다"고 말했다. 교과서로 기본을 다지고 차분히 실력을 쌓기보다 문제풀이의 절대량을 늘리는 것이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녀석의 전략이었다.


축구를 좋아했던 H는 점심시간에 같이 축구를 하자는 친구들의 제안도 거절하고 한 문제라도 더 풀기 위해 고3 때만 몸무게가 10kg 이상 늘었다고 했다. 수능이 끝나고 녀석은 다시 3달 만에 10kg 이상을 뺐다. 녀석은, 독했다.


"부모가 부자도 아니고, 수능시험도 똥이 돼 별 볼 일 없는 대학에 들어갔으니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자."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H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유복하지 못한 가정환경, 수능 실패라는 공감대 때문인지 아니면 H 스스로가 자기 암시의 주문을 걸기 위한 대상으로 누구라도 필요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녀석은 자신에게 성공이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내게 말했다.


실제로 32살이 된 H는 그 또래의 동기동창생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시에 통과한 X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있는 것 같았다. 대기업 상사맨으로 또래보다 2~3년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녀석은 높은 연봉과 선물 투자 등으로 돈을 좀 모았다고 말했다. 하나에 빠지면 독하게 파고드는 녀석의 특성상 녀석은 해외 선물 투자를 할 당시 하루에 2시간을 자면서 해외의 각종 주식 차트와 현물 차트 등을 빠짐없이 챙겼다고 했다. 서른둘에 녀석은 좋은 집과 나쁘지 않은 차, 넘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예금을 갖고 있었고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듯했다.


녀석은 지금 자신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평생을 함께 할 꼭 맞는 여자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H는 수능을 앞두고 시중의 모든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었던 것처럼, 선물 투자를 하기 위해 매일 2시간을 자면서 차트를 들여다봤던 것처럼 결혼할 여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혼할 상대자로 녀석은 자기와 나이가 같거나 연상인 여자는 절대로 사절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상사맨인 자신도 지독한 장사꾼인데 자기와 연령이 비슷하거나 높은 여자들이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는 것을 보면 역겹다고 했다. 그리고 녀석이 뱉은 다음 말과 그 뒤의 이야기는 서른 초입의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충격이 컸다.


녀석은 1~2년 전에 과외를 한 달에 3개나 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돈도 많이 버는 녀석이 굳이 부업으로 과외를 할 필요가 있었냐"고 물었다. H는 내 물음에 자신이 과외를 한 것이 아니라 과외를 받았다고 했다. 녀석에게 과외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이유인 즉, 과외 사이트에 일본어 회화나 바이올린 등 필요한 과목과 페이를 올리면 그쪽을 전공한 대학생이 H에게 신청서를 낸다. 20대 초중반의 여대생 이력서 서너 장을 검토해 보고 녀석은 그중 한 명에게 과외를 받았다. 본인이 선택한 여대생이 한 달에 4번, H가 편한 시간에, H가 편한 장소로 찾아왔다. 소개팅에 나가서 맘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몇만 원을 쓰는 것보다 과외를 받는 편이 1회 만남 기준, 훨씬 더 경제적이라고 H는 설명했다. 섣부르게 수작을 걸지 않아도 한 달의 시간 동안 자연스레 친분이 쌓이고 H에 대해 알게 되면 여자 쪽에서 먼저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고 했다.


H는 "1~2년 전 과외를 받았던 몇몇에게 최근 연락이 와서 만나거나, 그들로부터 다른 여자를 소개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H는 한 개인으로서 만날 수 있는 상대방, 소개팅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인맥의 한계를 과외라는 '시스템'을 통해 극복했다. 그리고 녀석은 다른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도 구조와 시스템을 먼저 파악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을 짰다. 설령 게임을 지배하지는 못하더라도 녀석은 단 1g의 성공 가능성과 확률을 산술적으로 높이는 접근 방식에 최적화해 움직였다.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말의 전쟁을 매일매일 수행하는 나였지만 그날 H의 말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녀석과 나는 그날 3시간, 4시간 혹은 그 이상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녀석이 내게 '과외'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단 10분여에 불과했다. 과외는 그러니까, 그날 나눈 대화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잘 안 듣는 나였지만 그날의 충격이 워낙 컸던 탓인지 나는 그날 이후 약 1~2년 정도 H의 방법론을 내 삶에 적용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 후에 결국에는 나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지만 H의 방법은 내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의 방법론은 내게 언제나 '뛰는 놈, 그 위의 나는 놈,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어떤 놈'을 상정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지침이 되고 있다.



*수요 산문회(수산회) 네 번째 글쓰기 과제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사건, 사람

(201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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