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혼술러'가 되어간다

나는 원래 시리즈 2

by 거짓말의 거짓말

나는 원래 혼술을 거의 하지 않는다. 특히 집에서 혼술을 하는 경우는 아예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는 지금은 단 한 방울도 술을 입에 대지 않지만 2~3년 전까지만 해도 술을 엄청 드셨다. 술에 만취한 아버지의 모습과 언성이 높아지는 엄마를 보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흔을 전후해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 완전히 술을 끊었다. 엄마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담배도 끊으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20대부터 30 중반인 지금까지 집에서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모처럼 네 식구가 다 모여서 저녁을 먹으며 와인이나 양주 같은 걸 따도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만큼은 예외였다. 호텔을 잡으면 예외 없이 거의 첫날 편의점에 들려서 맥주를 사서 호텔 냉장고를 채웠다. 보통 혼자 먹을 수 있는 양보다 많은 맥주를 채워뒀기 때문에 가끔 체크 아웃을 할 때 남은 맥주를 그냥 두고 나오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습관이 있고, 습관이 특정 장소와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 뇌는 특정 장소에서의 습관을 학습하면 특정 장소에 가는 것만으로도 그 습관을 실행할 준비태세에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시절 학교 책상 위에서 잠만 자던 학생은 그 책상에 앉으면 잠에 들 확률이 높은 것이다.


내게 해외의 호텔 방이란 집과 달리 맥주를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장소였다. 헬스를 한창 열심히 할 당시라도 여행지에서는 모든 리미트를 풀고 맘껏 맥주를 마신다. 평소보다 늦게 자고, 평소보다 월등히 많은 맥주를 마신다. 평소에는 운도 없고 되는 일도 없지만 어쩐지 여행지에서 만큼은 운도 좋은 편이라 이런저런 일도 많이 생긴다. 맥주를 많이 먹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행지에서의 나의 자아도 평소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은 그가 쓰는 언어(말)에 따라 다른 행동 패턴과 성격을 보이기도 하는데 여행지에서의 나는 인간 'H(이름)'가 아닌 제이크나 토마스가 되는지도 모른다. 기왕이면 평소에도 제이크나 토마스로 살 수 있으면 지금처럼 내 인생이 지루하진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에 반해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을 것 같으므로 지금도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다, 고 스스로를 달래는 수밖에 없다.


이제 술을 완전히 끊은 아버지는 1년에 한두 번 있는 모처럼의 해외 가족 여행에 가서도 단 한 방울의 맥주도 마시지 않는다. 아버지의 금주가 반갑기도 하지만, 어쩐지 조금 안쓰럽기도 하다.


뭐,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지금 시각은 새벽 1시 32분이고 나는 좀 전에 혼술을 했다. 500ml 수입 맥주 한 캔을 gs25 편의점에서 산 잠발라야 스모크 닭다리, gs25 자체 브랜드 상품인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 팝콘을 안주 삼아 마셨다. 이사하고 초기에 생수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생수만 사고 오기 미안해서 수입맥주 4캔을 함께 샀다. '혼술 해야지'하고 마음먹고 산 것은 아니었다. 어제도 1캔을 마시고 잤는데 오늘도 1캔을 마셨다. 이틀 연속 '집'에서 혼술을 한 것은 내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세종에 따로 나와 산다고 했을 때 한 선배가 "이제 혼술 자주 하겠네?"하고 묻기에 나는 "전 원래 집에서는 술 안 마셔요"라고 자기 확신에 차 말했는데 단박에 깨졌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나에게 집이란 장소는 가족과 함께 사는 곳이었고 호텔 방은 나 혼자 자는 곳(예외도 있지만)이었는데 지금의 장소는 후자에 가깝기 때문일까.


'나는 원래 시리즈'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 지금의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지금 H가 아니라 제이크와 토마스의 중간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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