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생각
나는 기본적으로 게으름뱅이다. 안 보이는 곳에서 남들이 얼마나 게으른지는 모르니까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얼마나 더 게으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느끼기에 이 정도면 게으름뱅이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2년 정도 같이 룸메이트로 살았던 후배의 얘기를 들어봐도(선배와 살 때는 그렇게까지 게으르지는 않았다) 확실히 나는 게을러도 될 만큼은 끝까지 게으른 편이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변기 청소를 하지 않아 변기 속에 초록 이끼가 낀 적도 있다.) 나쁜 말로 하면 불성실한 편이고, 조금 순화해서 표현하면 요령을 피우는 성격인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시절 조별 과제를 하거나 팀 프로젝트를 할 때 누군가 리더로 나서거나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한다면 마음 푹 놓고 녀석에게 모두 맡겨버린다. 그리고 결과물에 대해선 절대 토를 달지 않는다.
또 되도록이면 눈에 띄고 싶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언제나 그렇게 쉽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도 있다. 혹은 더 나아가 팀에 있는 모두가 나보다 더 게을러서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경우도 있다. 뭐, 그런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묵묵히 혼자서 그 프로젝트를 완수하기도 한다. 그룹 안에 나보다 덜 게으른 녀석이 있었다면 아마 그 녀석이 같은 일을 했을 것이므로 불평을 할 수도 없다.
이런 것은 여럿이서 밥을 먹는 자리에서도 비슷한데 누군가가 내 대신 뭐라도 좀 떠들어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을 경우엔 어쩔 수 없이 내가 지껄인다. 기본적으로 그런 자리에서는 침묵보다 누군가라도 말을 하는 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게으름을 피우다가 꼭 필요할 때 꼭 필요한 만큼의 일을 하는 것을 선호한다. 여기서 마지막의 마지막이란 어떠한 일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고, 꼭 필요한 만큼의 일이란 그 상황을 모면할만한 정도의 일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요구되어지는 것 이상의 일을 데드라인에 앞서 미리 완수하기도 한다. 평상시의 게으름을 만회할만한 무언가가 내게도 가끔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태도와 마음가짐은 그러니까 학생일 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사회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면 사실 굉장히 위험하다. 그 정도는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게으름을 상쇄하기 위해 내 '심리적인 시계'를 20분 정도 앞당겨두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회사의 출근 시간이 8시까지라고 하면 나는 마음속에서 회사의 출근 시간을 7시 40분에 세팅해 놓는다. 이렇게 세팅을 해놓은 상태에서 7시 41분에 출근을 하게 되면 나는 1분을 지각하는 게 된다. 일단은 사회생활이고 보니(장난이 아니라는 뜻) 어떤 커다란 불상사가 있지 않은 한에야 7시 40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하려 노력한다. 매번 딱 맞춰 출근하면 아침에 서두르느라 실수도 하고 조급하기도 하니까 5분 정도 일찍 출근하기도 한다. 이러면 보통 남들보다 25분 정도는 일찍 출근하게 되는 것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심리적인 시계를 20분 정도 앞당기는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인생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순해진다. 우선 아침에 5분을 지각하면 하루 종일 뭔가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10분만 일찍 오면 하루가 굉장히 여유롭다는 느낌이 든다. 또 주변에서도 가끔은 '이 녀석은 보기보다는 성실한 녀석이군'하고 멋대로 오해를 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저는 여러분의 생각만큼 성실한 사람은 아닙니다’하고 변명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냥 잠자코 있는다.
비슷한 방식을 연애에도 적용하면 확실히 내 인생이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좀 든다. 그러니까 나는 종종 특정한 상대를 어느 선을 넘을 만큼 좋아하게 되면 여유를 잃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속수무책인 천하 제일의 멍청이가 돼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상대 쪽에서 내게 쉽게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상대 앞에서 너무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으면 그런 식의 불편함은 어떻게든 상대에게도 전해지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20% 정도만 상대에 대한 마음을 쿨다운(cool down)시킬 수 있으면 관계에 있어 훨씬 더 능숙해지지 않을까. 과거 있었던 몇 번의 실패를 교훈으로 언제부턴가 누군가가 너무 좋아지려 하면 그 사람의 단점을 찾아내어 스스로에게 ‘그 사람은 내 생각만큼 멋지지 않다’는 자기암시(최면)를 걸려고 노력한다. 가령 '저 애는 왼쪽 눈썹과 오른쪽 눈썹의 모양이 달라'(사실 모든 사람의 얼굴은 좌우가 다르지만) 라거나 '쟤는 어쩐지 (실제로는 먹더라도) 순댓국도 못 먹을 것처럼 생겼어'라거나 하는 식으로 자기 암시를 거는 것이다. 좋아함의 정도가 20% 정도 낮아지면 그럭저럭 상대를 ‘보통 사람’ 대하듯 대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관계가 시작된 이후라도 늦지 않다,라고 혼자서는 결론 내리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주변에 물어보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들 한다.
결론: 어떤 게으름뱅이에게 연애란 너무나 멀고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