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느끼는 순간에 대하여
"머리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짧게는 두 달, 길게는 반년까지.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곤혹스러웠다. 적당히 짧게 쳐주세요, 가 최선을 다한 내 답이었다. 머리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라는 질문은 내 머리스타일을 어떻게 바꿔야 더 나은지, 스스로가 어떻게 해야 더 멋진 모습이 되는지를 가장 잘 아는 당사자에게 당연히 물어봐야 하는 질문이었고, 앞으로 내가 치를 돈에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머리스타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십 년, 이십 년을 살아왔다. 좋은 옷을 입거나, 머리를 멋지게 만드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 봤자 어차피 나는 나니까.
나는 나에게 인색했다. 나는 내가 나인 게 퍽이나 맘에 들지 않았다. 왜 하필 나는 나일까.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도 학대를 당하거나 애정 결핍을 느꼈던 기억은 없었다. 다만 "아, 사랑 때문에 너무 배불러"라는 기억이 없는 정도였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도 이유가 없어 나쁠 건 없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폭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도 할 수 없는 일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니까. 설령 “사랑해”라고 말하는 일이 단순히 지금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지라도 별것 아닌 자신이 그 말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라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사랑을 말할 수 없어도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가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말하기 전까지 그것은 있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것은 말해짐과 동시에 세상에 나타나는 무엇이었다.
그것을 말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큰 덩어리가 됐고, 점점 더 무거워졌고, 나는 그것을 점점 더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그것을 말할 기회를 놓쳤던 나는, 그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느끼지 않으면 그것을 말할 수 없게 됐고, 그것에 노출되는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시간의 힘은 어쩌면 사랑보다 위대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제 어쩌면 그것을 꼭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노래 가사였던가, "당신은 나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
설령 내가 나 자신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지 못할지라도 어쩌면 괜찮을지 모른다. 내 이름은 내 것이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불러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사랑도 내가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있다. 덜렁이고 볼품없는 몸일 지라도 나에게도 뼈와 살과 피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가끔은 누군가에게도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몸과 몸이 의미를 갖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몸과 몸이 맞닿을 때, '사랑'을 대체할 만한 단어들이 세상에는 무궁무진하다.
“머리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다음번에는 조금 더 쉽게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투블럭으로, 옆머리는 13mm로 짧게 쳐주시고요, 뒷머리랑 옆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잘라주세요."
*소셜 살롱 두 번째 수업(2019. 0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