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떡볶이를 먹는 커플과 싸우는 커플에 관해

by 거짓말의 거짓말


거리를 걷다 보면 다양한 커플들을 볼 수 있다. 남자의 한 쪽 외투 주머니를 공유한 체 걷는 커플, SK 야구 잠바를 쌍으로 입은 커플, 미녀와 야수 커플, 한눈에 봐도 불륜인 게 티가 나는 커플 등등. 뭐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세상에는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커플들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 눈을 잡아끄는 커플 군(群)이 있다. 바로 길거리 떡볶이를 먹고 있는 커플과, 거리에서 소리 높여 싸우고 있는 커플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커플이지만 그 두 종류의 커플을 보는 내 감상은 이상하게도 똑같다.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리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커플'의 의미는 기표 자체만큼 단순하지 않다. 내게 그것은 굉장히 복잡하고 심오한 관계의 미학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개념이다.


우선 길거리 음식인 떡볶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은 두 커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행됐음을 뜻한다. 첫 데이트에서 파스타나 스테이크 대신 길거리 떡볶이를 택하는 상식적인 한국 남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길거리 떡볶이는 두 연인이 얼마간 내숭과 격식을 걷어내고 서로 간의 인간적인 틈을 허용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거리 떡볶이를 먹는 일을 연인 앞에서 트림을 하거나 방귀를 뀌는 행동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곤란하다. 어디까지나 길거리 떡볶이는 "초기의 관계보다는 훨씬 더 친밀해졌지만 아직까지 긴장을 완전히 풀 정도는 아닌 것 같아"와 같은 느낌인 것이다.


떡볶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주머니 사정에 대한 배려가 있었을 수도 있다. 가령 지난밤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바닥이 돌아가는 고층 빌딩의 레스토랑에서 멋진 식사를 대접한 남자 친구의 지갑을 고려해 길을 걷던 여자가 "나 떡볶이 먹고 싶어."하고 갑자기 말을 꺼냈을 수도 있다.


여기에 더해 길거리 떡볶이는 계획되지 않은 즉흥성 혹은 우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커플도 그날의 점심 메뉴나 저녁 메뉴로 길거리 떡볶이를 계획하지는 않는다. 데이트를 하기 전에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점심은 부천역 2번 출구로 나와서 경인문고 쪽으로 300m 정도 가다 보면 있는 길거리 떡볶이 집에서 먹지 않을래? 그 왜 할머니가 가끔씩 거스름돈 더 주는 거기 있잖아"하고 묻지는 않는 것이다.


길거리 떡볶이는 길을 걷다 허기를 느낀, 이제는 어느 정도 관계가 진척된 커플이 우연히 선택하게 되는 그런 메뉴인 것이다.


가끔 연예인들이 tv에 나와서 "연인과 '길거리 떡볶이'를 먹어보고 싶어요" 하는 차원과는 다르지만 (그들은 단순히 '평범한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뜻일 게다) 어쨌든 길거리 떡볶이를 먹고 있는 커플은 '부럽다'. 게다가 그 커플이 선남선녀 커플일 경우에는 더욱.



길게 쓰긴 했지만 사실 떡볶이를 먹고 있는 커플은 떡볶이를 먹고 있는 커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하지만 정말로 나로 하여금 '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 게 만들고, 곧 그런 자신을 싫어하게 만드는 커플은 따로 있다. 바로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커플.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에 둘 밖에 없는 양 그 둘만의 세계에서 감정을 마음껏 분출하고 있는 두 남녀.


누군가는 서로에게 '화'라는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찬 두 연인이 뭐가 부럽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이 타인에게 정말로 화를 낼 수 있는 관계란 굉장히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이성을 잃을 만큼, 혹은 거리에서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화를 내 본 기억이 없다. 애초에 내 주변의 타인에게 크게 화가 나 본 적도 없다. 타인은 어디까지나 타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어느 선 이상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이상한 녀석 같지만 단순히 겁이 많은 것뿐이다.)


경우에 따라서 특정 상대에게 '실망'을 하거나 '서운함'을 느끼는 경우는 있지만 화를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혹은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서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서로 간에 '약속'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애리히프롬 역시 <사랑의 기술>에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어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마음껏 화를 내도 되는 것이 약속된 관계'라는 건 내게는 미지의 영역이며 더 늦기 전에 한 번쯤은 겪어보고 싶은 일이다. 나는 화를 내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는지 모르지만 화난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데는 굉장히 익숙하다고 생각한다. 군대에서 이미 경험적으로 증명해 봤다. 군대뿐 아니라 어쩐지 무리에서도 이상하게 구박받는 캐릭터다.


p.s. 만약 누군가가 "그럼 거리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던 선남선녀 커플이 뭔가 사소한 계기로 감정이 틀어져서 오뎅 꼬치를 들고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있다면 네게는 가장 부러운 커플이 되겠네?"하고 물어본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인생이란 수학과 달라서 좋은 것에 좋은 것을 더해도 언제나 더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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