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인생

by 거짓말의 거짓말

나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편이다. '지난 4~5년간 가장 화가 났을 때가 언제입니까?'라고 누가 물어도 딱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이건 내가 머리가 나쁜 탓도 있지만 진짜로 화가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에게도 크게 동요되지 않는 편이다. 국민 대다수가 분노하는 사회적인 악이나 폐륜에 대해서는 필요에 의해 적당히 화라는 감정을 위장하기 위해 애쓴다. 가령 희대의 살인마나 인재로 밝혀진 국가적인 참사와 같은 사건들 말이다.


이런 연유로 누군가가 굉장히 화가 났을 때 나를 찾아와 상담을 한다면 이는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행동이다. 나는 굉장히 화가 난 당사자의 감정에 호응해 주기보다는 상황을 중립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때로 나를 찾은 사람이 눈앞에 있지 않은 제삼자를 험담하기라도 하면 나는 그를 같이 씹는 대신 공평함을 위해 입이 없는 제삼자의 변론을 맡기도 한다. 그러면 상담자의 분노 게이지는 급격히 치솟는다. 뭐 대충 그런 식이다.

아, 가끔 내게도 화라는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가 있는데 그 경우는 그 감정의 타깃이 타인을 향하기보다 스스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라는 감정이 타인에게 향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어느 시점부터 타인에게 기대를 하는 것을 단념하는 방식을 체화해 왔다(훈련을 해왔다는 표현도 괜찮을 듯하다). 타인에게 기대를 하지 않으면 그가 나를 실망시킬 일도 없다. 실망하지 않으면 화도 나지 않는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세상에서 화를 마음껏 표출하는 딱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엄마다. 가끔 별것도 아닌 일로 소리를 지르거나 못되게 굴어서 엄마에게 상처를 준 경우가 많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가장 한심하고 막돼먹은 행동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만은 앞서 말한 분노 억제 장치의 스위치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어쩌면 엄마의 몸에서 만들어진 나는 엄마만큼은 ‘타인’과는 다른 영역에 두거나, 나의 일부로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에게만은 화를 허용하는 것처럼 엄마에게도 화를 낸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아빠에게는 타인에게 그렇듯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빠에게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연민이다. 이 부분을 설명하자면 굉장히 복잡한데 대충 꼬인 실을 적당히 풀어 설명하자면 연민이란 감정의 결과로써 나는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아이는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상대가 아이를 원하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타인에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니 나의 33년 인간관계는 대체로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나는 아직까지 살면서 큰 적도 없고 굉장히 깊은 아군(친구)도 없다."


이 문장을 보면 혹시 서운해 할 수 있는 녀석이 있을 수도 있어서 굳이 부연하자면 여기서의 '굉장히 깊은 친구'란 간도 쓸개도 빼줄 수 있는 친구 정도인데 어찌 됐거나 나는 간도 하나고 쓸개도 하나라서 되도록이면 내 간과 쓸개는 소중히 해야겠다는 주의다. 물론 내 친구의 간과 쓸개도 내 것만큼 소중할 것이기 때문에 상호 간의 호해는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간을 빼주는 건 우화의 토끼 정도면 족하다. 그리고 전혀 다른 얘기긴 한데 나는 적당한 근거로 토끼 타입의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빠르지는 않다.


학창 시절을 돌아봐도 내 주변에는 큰 적도 굉장히 깊은 친구도 없었다. 40~50명이 넘는 인간이 무리 생활을 할 경우 어쨌거나 그 큰 그룹 안에서도 소그룹이 생긴다. 내 경우 기본적으로 나를 포함한 소그룹에 소속돼 있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소그룹과도 별 무리 없이 지내는 편이었다.


중학교 시절을 예로 들면 나는 적당히 공부를 하는 녀석들의 집단을 주 활동범위로 삼고 축구를 좋아하는 녀석의 그룹, 이미 벌써 여자를 알아버린 녀석의 모임, 싸움을 잘 하는 소위 일진 녀석의 패거리에도 적당히 섞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단은 회사생활 혹은 사회생활도 큰 적도, 간도 쓸개도 빼줄 아군도 없는 상태로 지속하고 있다고 스스로는 진단하고 있다.


이런 삶의 방식을 택하다 보니 아직껏 크게 나를 싫어하거나 내게 화를 내는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어떤 이유로 나를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의 집단군이 있다는 것을 최근 발견했다. 그들은 하나의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바로 '내가 한 때 호감을 가졌던 여자애 혹은 여자들'이다.


물론 내가 한 때 호감을 가졌던 여자애 혹은 여자들 전부가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략 그 비율을 나누자면 나를 싫어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5대 5 정도다. 나를 싫어하지 않았던 여자 쪽의 경우 대체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지 호감을 표시했고 그녀들이 나를 거절한 경우가 많다. 거절의 순간 그녀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관심 밖이 되고 굳이 화를 낼 이유도 없어진다.


나를 싫어하는 쪽은 조금 복잡하다. 그리고 이쪽의 그녀들의 경우 내가 조금 더 진지하게 호감을 가진 케이스가 많다.


자체 분석 결과 그녀들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아래와 같이 추정한다.


나는 그녀들을 오랜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주변을 맴돌다 어떤 계기나 구실을 만들어서 큰 맘을 먹고 데이트를 신청한다. 대체로 첫 데이트는 성공한다. 첫 데이트를 거절하면 그녀들은 ‘거절의 그녀 월드’로 넘어가게 되고, 나를 싫어할 이유도 없어진다.


문제는 두 번째 데이트다. 대체로 남자들의 경우 첫 데이트 이후 폭풍처럼 두 번째, 세 번째 데이트를 진행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고백을 해서 관계의 향방을 결정한다. 허나 내 경우 좀처럼 두 번째 데이트라는 것이 어렵다.

첫 번째 데이트 이후 두 번째 데이트를 할 구실을 찾기 위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고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평소의 내 게으름 탓은 아니다. 나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 부지런하게 두 번째 데이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정말로 쉽지 않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고 싶은데 같이 보고 싶은 영화는 두 달 뒤에 개봉한다거나, 저녁을 먹자고 제안해야 하는데 적당한 식당을 찾지 못하겠다거나, 여자애가 교회를 다니는데 무교인 내 신념을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좀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한 달 혹은 두 달이 지나서 두 번째 데이트 신청을 하면 이상하게도 상대는 '싸늘한(말 그대로 싸늘하다. 반응만 봐도 나에게 화가 났거나 나를 싫어하고 있다는 기운이 팍팍 전해져 온다)' 반응을 보인다.


그럼 나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 여자애는 나에게 화를 내지?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게 그렇게도 싫은가? 여자는 참 이상한 동물이군, 하고 체념하게 된다.


+

'어떻게 좀 해봐'형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쓰려했으나 밤이 늦어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남자와 여자의 이상한 심리 메커니즘도 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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