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이 까진 소녀에게 반창고를 붙이는 것
아침 8시쯤 여의도역을 나오면 전단지를 주는 사람들이 몇 있다. 할머니라고 부르면 실례일까라고 생각되는 연령대의 여성, 은행의 신입사원 등등 다양하다. 가능하면 주는 전단지는 모두 받아온다. 특히 나이가 있으신 분이 주실 때는 더 그렇다. 전단지를 다 돌려야 할머니(혹은 아주머니)의 일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 장 더 받는다고 뭐 달라질 게 있겠냐만은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할머니(아까 그 아주머니)의 퇴근은 조금 더 빨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이런 내 작은 '선의'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부정적 외부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입장이 아닌 전단지를 통해 광고를 하는 가게나 점포의 입장에서는 구매 의사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전단지를 받아 가는 것은 '낭비'가 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어쩌면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어딘가의 쓰레기통에 전단지를 버릴 바에야 그것을 받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옳은'일 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서, 혹은 전단지를 받지 않는 것이 '옳은'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전단지를 받을 작정이다. 그러니까 내게는 눈 앞의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가게 주인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굳이 '전단지'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과 '정의'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눈 앞의 작고 희미한 빛을 가진 사람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환하게 빛나는 사람보다 더 매력적이다. 볼 수 없는 사람보다는 볼 수 있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사람보다는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하다. 또, 내게는 눈 앞에서 무릎이 까져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 아이가 지구의 반대편에서 기아와 내전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아이들보다 더 중요하다. 수치와 뉴스라는 상품으로 치환돼 막연하게 전달되는 지구 반대편의 거대한 일은 눈 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작은 일만큼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다.
하지만 누군가가 여기에 '기자'라는 직업윤리를 들이대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한 소녀의 '무릎의 상처'보다는 '기아'와 '총탄'에 죽어가는 더 많은 생명들을 지키는 것이 당위적으로 옳은 일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물론 맞는 말이다. 개인보다는 인류가 더 중요하다.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지키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의 무릎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빨간약을 바르는 일을 우선하겠다. 지금 내 눈앞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면서 지구 반대편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눈 앞의 작은 일을 외면한다고 해서 바로 지구 반대편에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단단해지는 것이다. 눈 앞의 아이에게 반창고를 붙이는 행위라도 그것이 생각을 하고 하는 일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생각이 실질적인 '힘'이 되어 지구 반대편에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과 생각이 모이면 생각 이상의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기자 혹은 글을 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한 손에는 반창고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펜을 꽉 움켜쥐는 것 정도일까.
<2013. 05 수습기자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