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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Nov 08. 2017

Scene

우리는 그날에 같은 코끼리를 보고 있었다

신문을 본다. 오늘이 4월 14일 목요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누군가가 내게 사실 오늘은 2008년의 4월 14일이야 라거나 오늘은 사실 5월 3일이야 라고 말해도 나는 '어, 그래. 그렇구나.' 하고 믿어버릴지도 모른다. 오늘이 며칠이든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생각된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이거나 심지어 내 생일이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특정한 날짜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념일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를 견디어 내기 위함이 아닐까? 매일 똑같은 씬(scene)이 반복되는 화면에 지루함을 깨주는 특정한 씬을 억지로 넣는 것 말이다. 

 
"나는 한 번도 내 생일 파티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 


그 날이 며칠인지는 잊었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나는 내 앞에서 아이스 티가 담긴 잔을 쥐고 있는 여자애의 투명한 손톱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생일 케이크나 고깔 모자, 폭죽 터뜨리기 같은 의식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야. 다른 사람의 생일에는 기꺼이 그 의식에 참여해서 우스운 모자도 쓰고 노래도 불러. 단지 내 생일은 그냥 그런 번잡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을 뿐이야. 그녀는 피하려는 내 시선을 억지로 빤히 쳐다보며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화장실에 간다던 그녀는 한참 뒤에 내 나이만큼 초가 꽂혀 있는 초코파이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나타났다. 뭐야,이건. 생일 선물.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닌걸. 그야, 네가 네 생일을 말하지 않으니까. 오늘부터 네 생일을 4월 14일로 정하기로 했어. 얼떨결에 초코파이에 꽂힌 초의 불을 끄자, 그녀는 내 등판을 한 대 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빨대를 가지고 장난치는 그녀의 검은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한껏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지금 이 장면을 잊어야만 하는 일이 생긴다면 슬플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날 그 장면에서의 그녀는 완벽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라 믿었다. 그 장면 속의 그녀는 변하지 않았지만 현실에서의 무언인가는 자꾸 바뀌어 갔다. 어쩌면 나는 4월 14일에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내 욕구가 내 앞에 있는 그녀를 아름답게 보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손톱에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한 손으로 악수를 청하고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우연히 길을 걷다 가판대의 신문을 보니 몇 월인가의 14일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만 받아들인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다른 것을 본다. 같은 코끼리를 보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방향에 가서 자리를 잡고 코끼리를 본다. 어떤 사람은 긴 코와 두 개의 다리를, 어떤 사람은 한쪽 눈과 네 개의 다리를 보고 그것을 코끼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초록색 선글라스를 끼고 초록색 코끼리를 본다. 설령 그가 코끼리의 실제 색깔은 초록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라도 그가 보고 있는 코끼리는 분명 초록색이다. 그가 일부로 초록색 안경을 썼기 때문이다.  
 
4월 14일의 그 장면에서 우연히도 나와 그녀는 같은 방향에서 코끼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도 나만큼  같은 코끼리를 오래 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1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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