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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Nov 08. 2017

사과

예쁜 공주님이 준 독이든 사과

미안해


마침표도 없이 날아든 단 세 글자는 10초가 지나자 액정의 검은 어둠에 삼켜졌다. 그 세 글자를 읽기 위해 10초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세 글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는 10일이 더 걸렸다. 불이 꺼진 자취방의 완전한 어둠 속에 누워서 생각했다.

'그 미안해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한 미안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그런 자신을 용서하고 긍정하기 위한 미안해였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나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잘 못 한 것이 없었다.
 
그녀를 올해 다시 만난 것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다루는 영문학 수업에서였다. 그녀는 자신은 지금 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며, 학부시절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전혀 읽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청강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그녀와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이던 5년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여자애들과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굉장히 불편해할 정도로 낯을 가렸는데, 그녀는 그런 내게 언제나 먼저 다가와서 내 이름을 부르고는 살갑게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러면 학부를 통틀어 가장 멍청한 녀석이 당황해서 우물쭈물 거리는 재미난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군대에 가면서 몇 년간 소식이 끊겼었는데, 이번에 수업에서 그녀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그동안 나와 학교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내가 자신을 불편해할까 봐 먼저 인사를 건네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수업이 끝나고 그녀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근처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 대화는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우리는 그 후에 별다른 약속이 없는 한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이 끝난 후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자신에 관한 많은 질문을 했고 나는 답했다. 그녀는 내가 묻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는 잠자코 들으며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에 계속 흥을 낼 수 있도록 적절하게 반응해 주었다. 학기의 끝 무렵, 4대 비극 중 마지막인 햄릿을 배울 즈음에는 나도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에 미처 몰랐었다. 아마도 내가 그녀를 알아 가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그녀의 질문에 대해 성실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그녀를 오해한 채로나마 계속해서 보기를 원했다면 말이다. 나는 내 앞에서 질문을 하는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궁금해했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거울을 바라볼 때처럼 내게 물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나는 그녀의 팔에 걸려 있는 바구니에 독이 든 사과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나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들려주었고, 그녀는 곧 같은 대답을 들려줄 또 다른 남자를 찾아 나를 떠나갔다.
 
그녀가 내게 사과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녀가 내게 사과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 남자를 만나러 떠나던 때였어야 한다. 굳이 그 남자와 헤어지고 이제 와서 '미안해'란 문자를 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녀의 사과는 내게 전혀 유익하지 못했다. 나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독이 든 그 사과는 다시 나를 열흘 넘게 중독시켰다. 


어쨌거나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바보처럼 떠벌렸던 사람이었다.


<20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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