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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Nov 08. 2017

첫 경험2

-뭐 하고 있어요? 아직까지 그 상태로. 여긴 지하철 안이 아니라구요. 어쨌든 우선 저부터 씻을게요, 그럼. 같이 씻는다고 해서 추가의 비용이 드는 것은 아니니까 원하면 욕실에 들어와도 상관은 없어요.

=저기. 죄송합니다만, 전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겁니다. 잠깐만 이곳에 있다가 나가게 될 거예요.

-예? 무슨 말이죠, 그건?

=들은 그대로입니다. 전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나갈 거예요. 그러니까 굳이 당신은 지금 씻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당신. 그럼 여기에는 도대체 왜 온 거죠?

 =원해서 온 게 아니에요. 여러 가지 사정이 꽤나 복잡하게 얽혀 있거든요. 하지만 설명하기는 힘드네요. 어쨌든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분명한 것은 당신은 지금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이상한 소리네요. 그래서 결국 당신은 원해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거군요?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어쨌든 혹시나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가끔씩 있어요. 당신 같은 사람. 지저분한 장난을 치는 아저씨들보다 정확히 스물여덟 배는 더 싫은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엄연히 이곳에도 이 일을 직업으로 삶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도 이일을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이니까 참아 낼 수 있는 거라구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자기만족을 위해 무책임하게 내뱉는 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요? 팽팽한 실을 끝까지 늘린 상태로 지탱해 나가는 사람에게 당신 같은 사람의 생각없는 한마디가 정말이지 나 자신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구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벌게 되면 내가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렇게 선심을 쓰면 만족하나요?

=정말 미안합니다. 정말이지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건, 뭐랄까...... 일종의 룰이니까요. 역시나 그쪽에게 그쪽의 사정이 있고 그쪽의 룰이 있듯이 제게도 룰이란 건 존재하니까요.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곳에 오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제 룰을 지킬 수밖에 없어요. 만약 제가 여기서 제 룰을 어겨버리게 되면 저는 더 이상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사소한 룰 일지라도 한번 룰이 깨어지게 되면 다른 룰들도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려서 어떻게 될지 모르거든요. 마치 성냥으로 위태롭게 쌓아 놓은 높은 탑처럼 말이에요. 어느 하나라도 제거해 버리면 그 탑은 붕괴되고 말 거예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룰에 대해 떠든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적어도 다른 사람의 지갑에서 나온 돈으로 다른 사람의 여성을 사는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저의 룰이에요. 만약 제가 다른 사람의 여성을 사게 된다면 그건 제가 제 지갑에서, 제가 땀 흘려 번 돈으로 값을 치렀을 때뿐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약속하죠.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한 달 안에 이곳에 다시 올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과는 다를 겁니다. 분명하게 값을 치르고, 혹시나 당신에게 실례가 아니라면 당신의 여성을 사겠습니다. 그리고 처음의 제 실수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가능하다면 제 왼손 검지 손톱을 뽑아서라도 사죄하고 싶군요.

-이상한 사람이네요, 당신. 그렇게 길게 설명해도 결국 ‘그건 룰이니까.’라는 말 아닌가요? 그건 룰이니까 어쩔 수 없어. 룰이니까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야. 결국 제 멋대로인 사람이네요. 그럼 제 룰은 어떻게 되는 거죠? 당신 룰 말고 제 룰 말이에요. 저는 절대로 남에게 공짜로 돈을 받고 싶진 않아요. 이건 제게 가장 중요한 룰이니까요. 다시 말해 제 룰 1호입니다.

=흠...... 어려운 문제네요, 그건.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저는 그 돈으로 지금까지와 앞으로 얼마간의 당신과의 대화를 사겠습니다. 절대 공짜는 아니에요. 당신은 남은 시간 동안 이렇게 저와 이야기를 나누어 주세요.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한 시간 남짓한 대화를 하고 몇십 만원이나 되는 돈을 받을 수는 없다구요. 이건 제 룰이에요. 룰 2호.

=그럼 이렇게 하죠. 전 그 돈으로 당신과의 대화와 여기 있는 이 콘돔을 사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여기서 당신이 'no'를 해버리면 누군가의 룰은 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심각한 문제는 저는 지금 많이 취해있고 만약 당신과 제가 그 짓을 한다면 남아있는 30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예? 뭐라구요?

=당신과의 대화와 콘돔을 사겠다는 겁니다.

-아니. 그거 말고 마지막에 당신이 했던 말 말이에요.

=한 가지 더 치명적인 문제는 저는 지금 많이 취해있고 만약 당신과 제가 그 짓을 한다면 남아있는 30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진지한 얼굴로 잘도 그런 말을 하네요. 당신.

=농담이 아니에요. 이건. 저는 30분 정도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과 제가 그 짓을 하게 되면 당신은 울음을 터뜨리게 될지도 몰라요. 울음을 터뜨리면서 제 등에 당신의 손톱으로 붉은색 오선을 그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역시나 당신 이상해. 평범하진 않아.

=저는 지극히 평범합니다. 다만 30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뿐이에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적어도 내가 아는 평범한 사람에 한해서는 그런 말을 하면서 당신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다구요. 게다가 당신은 절대로 정상이 아니에요. 이건 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문제와는 별도로 100% 확신해요. 당신은 절대로 제정신이 아니야.

=당신에게 또 심한 말을 한 거라면 미안해요. 사실 그건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모두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사실 저도 제가 30분 정도로 끝나지, 끝나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가끔씩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그래서 어떻습니까? 내가 한 제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거예요?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하죠. 당신에게 앞으로 남은 얼마간의 대화와 그 콘돔을 파는 것으로요. 나도 꼭 당신과 '그 짓'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다음 달 같은 날짜에 이곳을 찾을 것. 그리고 당신의 지갑에서 당신이 번 돈으로 계산을 치를 것. 그리고 '유키'를 찾을 것. 어떻게 보면 저는 이번에 당신에게 제 룰을 양보한 셈이니까요. 게다가 싸구려 콘돔 하나를 그렇게 비싼 값에 팔 수는 없다구요. 다음번에는 조금 더 좋은 콘돔을 준비해 놓을게요. 물론 그것을 쓰고 안 쓰고는 당신 마음이지만. 어쨌든 당신이 그런 것처럼 저도 제 나름의 룰이란 게 생겼으니까.

=알았습니다. 그럼. 다음 달 오늘 이곳에 다시 찾기로 하죠. 약속해요. 그건. 다른 건 몰라도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 이것도 제 룰이니까요. 그럼 유키씨.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저는 이제 곧 잠이 들 거예요. 피할 수가 없거든요. 역시나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설명하자면 꽤나 길지만 저는 이제 곧 잠이 들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되면 깨어나서 이곳을 나갈 거예요. 어쨌든 그럼 이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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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1 : https://brunch.co.kr/@lieoflie/6

첫 경험3: https://brunch.co.kr/@lieoflie/98

첫 경험4: https://brunch.co.kr/@lieoflie/100

첫 경험4-1: https://brunch.co.kr/@lieoflie/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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