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과거님, 기쁘게 보내줄게요

by NICK e Y


나의 과거 장례식


육아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딸이 2018년에 태어났으니, 거의 5년을 외면했던 것 같다. 내 삶 자체가 육아라는 것을. 육아는 단지 내 인생 주제의 일부라고 여기며 모순적이게도 아이가 나의 우주인 양 최선을 다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며 고군분투하는 듯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1순위는 항상 우리 딸이었다. 전문가의 길만 바라보며 밤낮없이 일했던 과거를 손끝에 붙잡고 분명 언젠가 내 브랜드를 만들고 다시 일어서리라 믿었지만 그래도 우리 딸의 일이라면 손발 벗고 나서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육아 체질은 아니더라도 꽤 공들이고 있다. 계획하진 않았지만 제2의 인생의 MAIN ROLE은 '엄마'이고 과거는 흘려보내야 한다. 아니, 예전에는 흘려보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스스로가 가엽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이상스럽게 기쁜 마음,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이제 오늘의 나를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나의 과거를 기쁘게 보내주려면 일단 언젠가는 친정 집에 있는 책이며 노트며 모두 버려야겠다 결심한다. 몸뚱이의 게으름이 당장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나의 과거를 보내주겠다는 마음가짐만으로도 너무 홀가분하다.



'육아'란,
엄청나게 큰 행복이 떨어져 집이 무너진 기분


아이가 없던 신혼시절, 남편의 사업을 대차게 지원해 줄 때가 있었다. 당시 신사동 쌀국숫집에서 회사원의 점심시간을 빌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그때 친구의 아들이 몇 살 정도 되었을 때였을까.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 우리 딸과 1~2살 차이려니 싶으니 그때 돌 즈음 그리고 지금쯤 벌써 학부모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가 말하길, 아이가 태어나면 너무 행복해서 집이 무너진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러니 사업 초반인 그때처럼 기반이 다져지지 않았거나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다면, 준비 없이 낳는 건 위험한 짓이라는 걱정 어린 조언을 해줬다. 아이가 없으면 그 말 자체를 불행으로 들을지 몰라도 그 입장이 되어보니 행복하다는 말이다. 행복은 한순간의 감정일 뿐 지속력은 없으니 그저 인간의 삶을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동일한 맥락으로 미혼 지인들과 이야기할 때 나 역시 과거의 내 친구가 된 듯 느껴진다.


"아이가 생기면 상상하지 못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던데요?"

"상상하지 못하죠. 정말 행복하고 정말 힘들고 행복하고 힘들고... 잘 때 그렇게 귀여울 수 없고..."


무슨 말인지... 어떤 미혼 분들은 나와 짧은 대화를 나누면 마치 내가 아이를 싫어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혼한 사람들이 "결혼해서 뭐 하냐. 혼자 하고 싶은 것 다 즐기며 사는 게 최고지." 하는 말과 비슷한 듯 다르다. 아이가 있는 선배 엄마들은 대부분 아이와 함께 육아라는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 정말 빠르게 커가는 아이를 보며 이제는 지나간 시간이 너무 아까워 하나씩 기록하고 싶다. 그 순간마다 기록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여력도 없었거니와 과거에 매달려 질질 끌려다니느라 내가 얼마나 육아를 잘해 왔는지 모른 채 스스로를 격려해주지 못했다.


'아이를 잘 키웠다'란,
'아이가 영재'라거나 '아이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요즘은 주말마다 전도식기 4세 - 7세 대상으로 하는 '영어미술'을 배우고 있다. 우리 부부는 '성인' 교육 투자에 워낙 관대하기에 일단 결제부터하고 시작했지만 첫 수업 전날까지 확신이 없었다. 육아를 위해 돈 백 쓰는 일이 과연 생산성 있는 짓인가, 딱히 육아만을 위해 해보고 싶은 공부는 아니었으나 이후에 배운 바를 확장시켜 가계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잡음 때문이다. 그러나 첫날, 영어미술이라는 대상을 대면하자마자 가슴속 따뜻한 두 손이 내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지금까지 너무 잘해왔고 지금도 정말 잘하고 있단다. 너는 확신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네 마음이 하는 이야기를 깊이 새겨듣고 여기까지 왔구나. 두 번째 너의 인생도, 딸의 다섯 살 인생도 네 진심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지고 있단다.'


물론 반성도 했지만 생각보다 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었다. 생각보다 내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멋지게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배짱 있게 잘 살고 있었다. 그렇게 와닿는 와중에, 누군가 우리 딸에 대해 칭찬이라도 한 마디 해주면 그렇게 뿌듯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TV나 인스타그램에서 자녀가 성인이 되지 않았음에도 육아 방법론을 운운하며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신기했다. 그들의 자녀는 떼도 안 쓰고 한글도 3살 때 뗴고 영어도 블라블라하며 똥도 스스로 닦는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젠 '나도 아이를 잘 키우고 있구나'라고 조금은 진정으로 느끼지만 우리 아이도 떼쓰고 유치원에 안 가려고 하고 울고 걷지 않으려 하고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니까.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고 하여 아이가 영재 거나 아이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러니 당신도 과거의 페이지를 흘낏 넘겨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당신은 아이를 정말 잘 키우고 있고 지금 너무 잘, 정말 충분히 잘하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