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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구두 (상)

단편소설

by 인생정원사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재구성된 이야기입니다. 한 때 로맨스 소설을 열심히 읽었답니다.


"원, 투. 차차차. 차차차."

"자, 따라 해 보세요!

"리드에 몸을 맡기고 흐르듯 따라가세요."


넓은 원목의 플로어에서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의 젊은 남녀가 차차차를 배우고 있었다. 이곳은 상가골목 2층에 자리한 댄스 학원이었다. 학원이 쉬는 일요일 오후의 동호회 클럽이 대관했다. 직장인들이 수업료를 모아 운영 중이었다. 밝은 햇살에 경쾌한 리듬, 가벼운 티셔츠를 입고 땀을 흘리며 스텝을 밟는 모습이 다들 사뭇 진지했다. 톰 존슨의 노래 'Sex Bomb'의 멜로디에 따라 박자를 맞췄다. 매달 신청을 받아 운영하는 D클럽은, 얼마 전 무한도전에 댄스스포츠가 등장한 뒤 회원 수가 부쩍 늘었다. 일종의 스포츠 클럽처럼 밝고 시원스러운 분위기가 매력이었다. 신규회원들은 자기소개 시간에는 하나같이 ‘댄스스포츠에 관심이 있어서 왔다’고 말했다.

주말 오후, 차차차 초급반에서 열심히 스텝을 암기하며 골반의 각도를 계산해 보는 스물여덟의 가영도 그 무리 속 한 명이었다. 평소 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왈츠나 룸바에 관심이 있었던 가영이 D클럽에 가입한 건 1년 전이었다. 그녀는 애버애프터에 나오는 '드류 베리모어'를 닮았다. 조금 씩씩했지만 다정한 이야기는 잘 못하는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스텝도 루틴도 잘 외우는 가영은 이상하게도 자유연습 짝을 지을 때는 인기가 없었다. 그나마 수업 때는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짝을 바꾸니 다행이었다. 이곳의 에이스는, 긴 웨이브의 머리를 한, 키 큰 서른 살 ‘사과’ 언니였다. 아무래도 늘씬하면 춤출 때도 모양이 사니 몸매도 실력이었다.

서로 별명으로 부르는 이곳에서 가영은 '토마토'였다. 커트머리에 눈치가 없던 통통한 토마토. 가영은 자신이 인기가 없는 이유를 가입 후 세 달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내숭도 없고 화장기도 없고 털털한 토마토는 오빠들에게 여자라기보다 남동생, 혹은 ‘형’에 가까웠다. 뭐, 그들만의 미팅 클럽이라는 걸 몇 번 뒤풀이에 나간 뒤에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그런 가영이 보기에 우스운 건, 멋진 남자는 강사 선생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여초 집단인 이곳에는 예쁜 여자는 참 많았지만.


“자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수고하셨습니다. 루틴 복습들 하시고, 다음 주 이 시간에 만나요.”


가영은 댄스스포츠 구두를 정리했다. 몇몇은 서로 수업 내용을 묻고 복습을 하기도 했고 강사 선생님에게 묻는 이도 있었다. 가영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자신의 발을 바라보면서 오늘 배운 걸 노트에 적을 계획으로 방금 배웠던 루틴을 암기 중이었다. 가지런한 베이지빛 라틴댄스 구두는 초가을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가영의 흰 발은 작고 무척 예뻐서 공단으로 된 구두가 잘 어울렸다.

"오늘 잘하던데, 토마토! 끝나고 맥주 한 잔 하러 가야지."

싹싹한 목소리로 사과 언니가 말을 걸었다. 같은 시기에 가입한 두 살 위의 사과의 본명은 '지혜'였다. 지혜는 가영에게 모르는 루틴을 물어보다 친해졌다. 사과와 토마토. 지혜는 안경점에서 일했다. 가영이 보기에 모르긴 몰라도 같이 수업을 듣는 남성회원의 절반은 새 안경을 맞춘듯했다. 지혜는 긴 생머리가 어울리는 단아한 생김새였다. 쌍꺼풀 없는 큰 눈에 잘 관리된 벌꿀빛 피부는 점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옅은 딸기우유빛 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천상 여자다운 좋은 사람이었다. 연습 중이라 시원하게 묶은 머리 옆에 작은 리본 모양 귀걸이가 반짝였다.

“내일 월요일이니, 출근해야지. 왜 안 가? 요새 안 오더라? 오랜만에 한 잔 하자. “

“아녀요, 저 한약 먹는 중이라서 술 먹기가 좀 그래요. 요새 일도 바쁘고. 전 그만 갈게요.”

“아이, 서운하네. 같이 시원하게 하자. 벌써 이번 달 마지막 수업이네! 다음 달 수업 신청했어?"

“그럼요, 언니. 또 봐요. 먼저 가서 미안해요."

‘술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거예요, 언니.’


가영은 재차 권하는 지혜에게 안녕을 고하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제 적나라한 그 시간을 또 겪기도 싫었으니. 그냥 실수였을 뿐이었다. 떠올릴만 한 기억도 없는 걸. 수업 후 굳이 지하철을 타고 와, 자취하는 아파트 근처 커피숍에 들렀다. 자취집은 동생이랑 살았기에 이곳이 가영의 작은 아지트였다.

"사장님, 저 고구마라떼 하나 주세요."

주문을 한 가영은 낡은 '후지쯔' 노트북을 꺼냈다. 그녀와 석사논문까지 써준 고마운 지기였다. 내일 출근 전 한번 금요일에 작업했던 과제를 다시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어느새 렌즈를 빼고 무테 안경을 쓴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집중하려던 찰나,

지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아까 사과랑 무슨 말했어?]

문자를 확인한 가영의 손이 차가워졌다. 동현을 클럽에서 사과의 '비공식' 파트너였다. 자신의 이름을 그래서 '나무'라고 지을 정도로. 셋은 같은 시기에 가입해서 듣는 수업도 비슷했다. 동현은 눈도 나쁘지 않은데 안경까지 맞춰서 쓸 정도였다. 둘이 언제부터 사귈 지는 클럽에서 모두 기대하는 이슈 중 하나였다.

[별 거 아녀요. 다음 수업 신청할 거냐고 물었어요.]

[그래?]

[그리고 뒤풀이 같이 가자고.]

[응, 별 말 아니었네.]

[걱정 마요. 그 일은 다 잊었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답장을 하지 않은 가영은 끈적이는 손바닥을 청바지에 문지르고 핸든폰 폴더를 닫아버렸다.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고구마라떼를 마시고 노트북을 닫았다. 그가 말하는 ‘그 일’은, 한 달 전 뒤풀이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가영은 그날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낯선 천장, 그리고 익숙한 사람. 드문드문 끊긴 기억. 그게 전부였다.

가영은 동현을 원망하지도 않았지만 지혜를 보기도 껄끄러웠다. 지저분한 상황에 자청해서 끼어든 자신이 조금 원망스러웠을 뿐. 그래서 다음 달 수업을 신청하지 않기로 했다. 영원히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마음을 준 것도 아니고 그저 술기운에 실수한 거지, 뭐. 곤란했다.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했다. 그리고 전전긍긍하며 지혜에게 말할까 싶어 초조해하던 동현의 얼굴이 더 이상 보기 싫었다. 그래, 잊어버리면 돼.

가영은 한 명 한 명 D 클럽 사람들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지웠다. 전화도 문자도 안 받으면 없던 일로 될 거야. 또 바보 같이 분홍구두를 원했네. 자신의 어리석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


문득 귓가에 동생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가영과 동생 나영은 이란성 쌍둥이였다. 무엇인가 원할 때의 동생의 조심스럼고 상냥한 목소리는 사과 언니와도 닮아 있었다.

"언니! 언니는 분홍원피스 싫어하잖아. 내가 입을게. 언니는 노란 원피스 입어."



다음화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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