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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구두 (중)

단편소설

by 인생정원사
이 이야기는 가상입니다. 현실의 지역, 단체와 무관합니다. 1화와 이어집니다.


“어머! 반값이네요?”

1980년대 후반, 뽀글한 파마를 한 쌍둥이 엄마는 시장에서 투명한 비닐 가방에 담긴 새 이불이 무려 50프로 세일이란 말에 고심했다. 몇년 째 쓰던 딸들의 이불이 낡아서 솜이 튀어나왔던 차였다.

“똑같은 것은 없나요? 딸이 둘이라 같은 것을 사가야 안 싸우는데.”

“에이, 이건 마지막 떨이라 반 값이유, 새댁. 여기 노란색 오리 무늬도 예쁘지 않수? 하나는 분홍색 구름무늬. 따로따로 구분해서 주셔유. 아니면 여기 분홍색 코스모스 무늬는 두 채 있어. 이건 신상이라 세일을 안 하는데. “

쌍둥이 엄마는 결혼을 일찍 해 아직 서른초반이었다. 귀여운 보조개에 뽀얀 피부를 가져 아직 새댁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이들이 둘 다 저 코스모스 무늬를 좋아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쌍둥이를 키우는 살림이란 늘 빠듯했다. 그리고 색깔별로 나눠갖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었다. 지금 전셋집에서 조금이라도 모아서 내 집 장만을 하려면 아껴야 했으니. 아이들에게 선택하라고 해야겠다.


***


그 시절 엄마가 사 왔던 분홍색 구름무늬 이불은 나영의 것이었다. 사실 가영은 분홍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공주옷‘은 분홍색이 절대 다수였다. 꼬꼬마 시절의 쌍둥이가 나란히 선물 받은 원피스를 입었을 때였다. 나영과 똑같은 드레스였는데 꼭 분홍색 돼지 같단 막내 외삼촌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그래서 가영은 분홍색이 싫었다. 그렇다 해서 국민학교 2학년 여자아이가 노랑오리 이불이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 오리는 매우 못생겼었다.

하지만 분홍색 원피스를 나영에게 미룰 때, 자기는 분홍색을 안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흰 피부에 보조개를 들어가는 가영은 외모는 엄마를 닮았지만 성격은 아빠를 닮았다. 동생 나영은 반대로 까무잡잡한 피부의 아빠를 닮았고 키가 가영보다 이미 10센티나 컸다. 어느 누구도 둘을 쌍둥이로 보지 않았다. 사실 같은 학년이라 자매라고 말하면 다들 놀랐다. 나영이는 만화 <나디아>의 여주인공을 닮았다. 가영 자신은 그래, <영심이> 같았다. 닮지 않은 쌍둥이로 태어난 것은 끝없는 비교를 들어야만 했으니까. 학교에서도 어디서나.


“나영아, 나 왔어.”

댄스스포츠 클럽을 무작정 그만둔 지 두 달쯤 되니 늦가을의 주말이었다. 손에는 슈퍼에서 산 새우깡과 자갈치 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자매는 생김새는 달라도 입맛은 비슷했다.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까지 왕복해서 배웠던 동호회 시간이 없어지니 생각보다 한가했다. 두 달 뒤의 가영의 볼은 전보다 갸름해져 있었다. 그녀는 몇 달간의 저금을 털어 살빼주는 한의원을 다니고 있었다. TV건강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유명한 한의사는 40대의 나이에도 아름답고 활력이 넘쳤다. 6개월 할부까진 무이자로 된다길래 결재한 300만 원. 그런데 그 한의원에서 하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이 일주일은 탄수화물도 단백질도 섭취하면 안 되고, 관장 같은 장세척을 다섯 번이나 해야 한다는 사실은 계약할 때는 잘 몰랐다. 어쨌든 두 달 사이에 10킬로그램이 빠졌으니 돈 값은 한 것일까.

“자, 네가 좋아하는 거야.”

“고마워, 언니! 언니 밖에 없네.”

배시시 웃으며 감사를 표하는 나영은 늘 손발이 차서 벌써 극세사 수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과자를 먹고 싶지만 바깥이 추워서 망설였던 동생을 보며 가영은 운동삼아 자신이 슈퍼를 다녀오겠다며 자원했다. 일요일 오후에 이렇게 심심한 것은 오랜만이라 정말 좀이 쑤셨다. 가영은 집에 오자마자 더위를 타며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둘은 정말 달랐다. 어쨌든 둘도 없는 자매였으니, 남은 한 달까지 잘 지내야겠다 싶었다. 나영은 한 달 뒤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한동안 바빴다가 요즘은 청첩장 돌리느라 약속이 잦았다. 나영의 이야기에 따르면 교사들은 결혼을 빨리하는 편이었다. 연구원인 가영이 주변은 전부 미혼이었다.

“언니! 나 오늘 모임에서 지희쌤 만났는데, 유리언니가 요즘 안 나온다고 걱정했다더라.”

“유리 언니? 유리가 누구였지?”

“그 댄스클럽의 별이 말이야.”

유리는 가영 자매보다 한 살 많았고, 몇 년 전 나영과 함께 발령받았던 교사의 지인이었다. 나영은 첫 발령받아서 동고동락했던 동기 몇과 꾸준히 만나고 있다. 조용하지만 사교적이었던 나영은 몇 가지 절친 모임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녔던 가영은 그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영의 절친모임에 있는 지희샘과 유리는 현재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다. 그녀는 출근이 일러 일요일의 뒤풀이에는 참가하지 않아서 친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대화로 서로가 공통분모가 있었단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세상은 참 좁았다.

"뭘, 별일 없어. 바빠서 그렇지. 다이어트 안 하고 구두 신고 뛰는 게 관절에 안 좋더라. 지희쌤에게 별 말 말어. 유리언니 깍쟁이라며.”

“알지. 벌써 그렇게 이야기했어. 그런데는 언니랑 안 어울려. 우린 집순이잖아. 결혼하면 자주 못 보니까 집에서 나랑 놀아줘.”

“그래, 네가 시집간다니 아쉽다. 이 집에서 8년간 좋았네, 정말 그리울 거야. “

한날한시 태어나 좋든 싫든 27년간 붙어 지낸 자매랑 떨어져 지내는 것은 무척 허전한 일이었다. 2년의 열애 끝에 나영은 결혼에 골인했다. 가영의 연애는 한없이 일방적으로 퍼주다가 남자친구의 바람으로 끝났었다. 댄스스포츠 클럽에 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이후로 가영은 남자를 믿지 않았다. 동현은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그녀는 전혀 상처입지 않았다.

“나도 언니가 그리울 거 같아. 참, 다온이가 이제 대학가니, 집에서도 신경 쓰이시나 봐. 나도 집에 오백 보냈어.”

“... 대단하다. 너.”

“등록금 갚은 건데, 뭐.”

혼자 모은 돈으로 시집가는 나영의 살림도 빠듯할 테인데. 나영은 늘 마음씀씀이가 넓었다. 예비 제부는 전문직이지만 그도 가영처럼 초년생이라 집안은 평범해서 자리 잡으려면 아직 멀었다. 순간 다이어트에 3백이나 쓰고 나영의 축의금을 얼마나 할지 걱정했던 자신이 가영은 부끄러웠다. 이 16평 아파트의 전세금도 나영이가 대출받은 돈이었다. 아직 사회초년의 자신은 일 년 동안 모은 돈이 고작 2천이었다. 그리고 다온이.

다온은 8년 터울의 남동생이었다. 그 이불을 사던 해, 남동생이 태어났다. 다온이의 것은 모든 게 새것이었다

“결혼 축하해, 나영아.”

스물여덟 나영이가 시집가는 해는 스무 살 다온이가 반수에 성공했던 해이기도 했다. 다음날, 가영은 큰마음을 먹고 동생 다온의 등록금과 동생 나영의 축의금으로 각각 100만 원을 보내고 연구원이 있는 도시로 옮겨 외곽의 보증금 1000만 원에 월 40만 원의 투룸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

2천의 저축에서 남은 돈은 이제 500만 원. 이사 갈 곳은 마을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야 했지만, 혼자 살아야 하니 그래도 안전한 동네로 택했다. 다행인 것은 버스로 30분 거리에는 나영의 신혼집이 있었다. 24평의 아파트는 부부가 전세금을 반반씩 냈다고 들었다. 한 달 뒤 둘은 그렇게 헤어질 예정이었다. 혼자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가영은 아직 몰랐다.


다음 화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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