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몇몇 장면은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에서 출발했지만,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이모! 이 구두 이모 꺼야?”
가영의 아파트에 9살 조카 모모가 놀러 왔다. 제 엄마를 닮아 늘씬하고 키가 큰 모모는 살구빛 볼에 보조개가 패인 모습은 또 가영과 닮았다. 엄마와 이모의 장점을 고스란히 닮은 모모가 제일 닮은 것은 사실 외삼촌 다온이였다. 이제 서른 살이 된 다온은 훤칠한 키에 잘생겨서 늘 인기 있었지만 아직 결혼 생각은 없었다. 집 값은 너무 올랐다며 핑계를 대는 다온은 매사 느긋했다. 막내동생은 직장을 구하자마자 다른 지역으로 원룸을 구했다. 그리고 지금은 명절 때나 얼굴을 보여주었다.
10년 전, 나영의 결혼은 소박했지만 아름다웠다. 동생은 큰 키에 잘 어울리는 멋진 머메이드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분홍빛 장미부케를 들고 있었다. 결혼사진의 가영은 짙은 베이지빛 블라우스에 검정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영은 부지런히 맞벌이 부부로 지냈다. 오늘밤은 모모의 남동생이 태어나는 날이라 가영이 모모를 돌봐주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나영도 늦둥이를 낳게 되었다. 엄마처럼.
조카 모모의 손에는 아주 오래된 그 시절 베이지빛 댄스구두가 들려있었다. 구두는 빛이 바랬고 회색빛 먼지투성이였다. 10년 동안 정말 까맣게 잊고 지냈던 댄스화. 그 이후로 어떻게든 이 작은 거처를 마련하려고 부단히 애써왔나 보다. 가영은 세 번의 이사를 거듭해 4년 전 지금의 집을 장만했다.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 이웃 동네 안경점에서 지혜를 보았다. 그녀는 삼 남매의 엄마로 분주했었고 여전히 예뻤으며 달라진 가영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가족이 생기면 뭐든 희미해지는 법이니 가영도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회원등록도 안 하고 렌즈만 샀었다.
“아이쿠, 버리려고 했는데. 이사 두 번이나 가면서 잘도 갖고 다녔네. 이건 말이지 모모야. 춤출 때 신는 신발이야. 외출할 때 신는 건 아니지.“
“오! 이모 춤 배웠어? 멋지다! 공주님 같아. 나도 가르쳐줘.“
“이제 다 잊어버렸어.”
“그럼, 신어봐도 돼?“
”모모 네가 아무리 키가 커도 어른 신발은 아직 이르지. 이따 저녁 먹고 근처 아울렛 가서 맞는 걸 사줄게.“
“야호, 이모 것도 사자. 우리 같이 공주님 해!”
“공주님은 무슨! 이제 여왕님으로 해줘. 그나저나 네 엄마가 너 낳을 때도 고생했는데, 둘째는 좀 덜 고생하면 좋겠다.”
서른여덟의 가영은 여전히 살짝 통통했다. 예전과 같은 하얀 피부였고, 모모와 같은 자리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지금은 부드럽게 웨이브 진 초콜릿빛 단발이 어깨 위에 찰랑거렸다. 웃으니 눈가에 주름이 살짝 잡혔지만 서른여덟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더위를 타는 그녀는 복숭아빛 티셔츠 차림이었다. 귀에는 작은 진주 귀걸이가 달려있었다. 가영은 몇번의 연애를 겪었고, 그 시절 동현을 다시 마주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저 구두만 아니라면 지금의 삶에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가영과 나영의 집은 차로 30분 거리였지만, 이제 버스가 아닌 작은 차를 몰고 조카 모모를 데려올 수 있었다. 가영은 자신을 닮은 모모를 예뻐했기에 종종 주말에 같이 시간을 보냈다. 10년 전 구했던 월셋집 투룸부터 지금 자신 명의로 된 16평 아파트까지 내내 혼자 살았다.
"이모는 왜 혼자 살아?"
가영은 베이지빛 라틴 댄스화를 손에 쥐고 잠시 말이 없었다.
"음... 이모도 한 때 결혼하려고 했었어."
"진짜? 그럼 왜 안 했어?"
"여기 이모 집이 좋아서."
3년 전 마지막으로 연애했던 남자친구는 거의 결혼까지 갈 뻔했다. 직장도 옮겨야 하고, 이사도 가야 했기에 내내 고민하다 상견례 직전에 포기했다. 그는 가영보다 훨씬 안정적이었고, 연봉은 세배 쯤이었다. 문제는 가영 자신이 0에서부터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친정엄마는 그런 가영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고 연락도 요즘은 소원해졌다. 지이잉. 식탁 위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이모 요새 연애해?”
“아니야. 이모가 뭘 좀 배우고 있어.”
“에이, 거짓말!”
”다온이 삼촌이 또래야. 그런 사이 아니야. “
“에이, 시시해.”
“모모야, 우리 신발 먼저 사고 밥 먹으러 가자. 얼른 준비해. 모모 공주님.“
9살 조카에게 '썸 탄다는' 곤란한 답을 할 수 없어 말을 돌렸다. 신중한 가영은 자신 보다 어리고 성실하고 또 잘생긴 그가 왜 호감을 표현하는지 계속 의아해 하던 차였다. 그가 독이 든 사과일지 혹은 기다려온 분홍구두를 선물할 남자일 지 판단이 안 됐다. 이제 가영이 원하는 것은 분홍구두가 아니라, 나란히 달릴 수 있는 운동화였으니까.
“모모야, 이모는 러닝화 사고 싶어졌어. 이제 춤출 일은 없으니 아깝다. 모모는 예쁜 구두 살래? 원하는 대로 해.“
“이모 그럼 나 구두 말고, 로퍼 사줘. 운동화는 많아. 색은 갈색으로.”
“역시 우리 모모는 제일 까다롭다니까. 알았어요.”
***
그 시각. 모 산부인과의 병실.
“처형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 덕에 당신 복직도 하고, 이런 날 안심이지.“
“언니에겐 늘 고맙지. 모모 어릴 때 아프면 종종 급할 때 연차도 써주고. 우린 휴가 잘 못 내니까. “
모모를 출산할 때 진통만 꼬박 하루를 했다가 결국 긴급 제왕절개수술로 첫아이를 낳았던 나영은 출산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외동을 주장했었다. 한 살 위 남편의 사무실도 이제 안정되었고, 집도 평수를 넓혀 세 번째 이사를 한 지 2년 되었을 무렵, 둘째가 생겼다. 이른 나이도 아니라 처음부터 수술 날짜를 잡고 기다렸지만, 사실 다시 처음부터 신생아 육아를 할 일이 막막한 것은 사실이었다. 예전보다 나잇살이 조금 붙고 미간에 주름이 조금 생겼지만 여전히 예뻤다. 만삭임에도 큰 변화가 없어 보이는 갸름한 얼굴은 그간 꾸준히 수영이 했던 덕분이었다. 옆에 있는 남편은 속없이 둘째가 아들이라며 실없이 웃고 있었다. 곧 부장 승진이 코앞인데, 육아휴직을 또 낼 생각에 조금 아득했다. 계획을 또 수정해야 하니 머리는 지끈거렸다. 이사라도 미리 해서 방 한 칸 여유가 있어 다행이지만, 태어날 아이의 등록금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지금 출산 휴가 직후에 방학이라 이미 눈치가 많이 보였다.
나영은 가영이 고마우면서 부러웠다. 엄마의 보조개는 가영에게만 있었다. 어린 시절 나영은 가영의 흰 피부와 보조개를 갖고 싶었다. 그것은 자신의 딸 모모가 물려받았지만 정작 나영에게는 없었다. 친정엄마는 매번 전화할 때마다 가영의 결혼을 걱정했다. 엄마는 가영이 포기한 3년 전 예비 사위를 아직도 아까워했다. 하지만 나영은 같이 살았던 10년 전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편안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사는 여유를 즐기고, 원하는 대로 연애했다 헤어지고. 나영 자신은 먹고 싶은 것을 먹는 자유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나마 학교 급식이 있어서 다행인 것인가. 모모가 좀 크면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남들은 부럽다 하는 직업이었지만 월급은 박봉이고, 신경쓸 것도 많았다. 지금이야 남편과 둘이 벌어 안정적이지만, 제대로 키우려면 돈과 정성을 다 기울여야 가능한 시절이었다. 나 자신의 욕심을 조금은 내려놓아야 했다. 태어날 아이도 모모처럼 참 예쁠 것이다. 나영은 자신이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엄마로서의 자신의 몫이기도 했다.
“그래도 언니가 좋은 사람 만나면 좋겠어. 이모 찬스를 매번 쓸 순 없잖아.”
멀리서 나영의 보호자를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수술 시간이었다. 아이를 낳는 것은 두번째라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그날 이후 모모의 외동 시절은 조용히 끝났다. 내내 외동으로 자랐던 모모에게는 조금은 당혹스러운 변화였다. 그러나 모모는 새로운 매일을 보내느라 바빴다. 이따금 가영의 집에 놀러와 늘어 놓았던 모모의 화제는 온통 남동생 이야기 뿐이었으니, 동생을 귀여워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가영은 또 다른 조카를 볼 때면 마음이 또 달랐다. 모모때는 몰랐던 말랑한 감정이 밀려왔다. 꼭 말아쥔 작은 손에 손가락을 끼우고 보고 있노라면, 무엇인가 뭉클하고 벅찬 것이 느껴졌다.
“이모! 운동화 바뀌었네! 처음 보는 거다. 새로 산 거야?“
가영의 신발을 본 모모가 물었다. 1년 전에 가영과 모모는 아울렛에서 갈색 로퍼와 살구빛 러닝화를 샀던 이후로 모모는 가영의 신발에 관심이 많았다. 돌을 맞이한 주에 가영은 해외출장이 잡혀 부득이하게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조카의 생일 선물을 주러 휴가를 내어 들린 나영의 집은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에 여전히 깔끔했다.
“응. 선물 받았지!”
분홍빛 머그잔에 홍차와 커피, 오렌지 주스를 담아 가져오던 나영이 물었다. 출산 1년 뒤의 그녀는 곧 복직을 앞두고 있었다.
“언니, 연애 해? “
“아직, 비밀이야. 나중에 알려줄게.”
가영은 같이 달릴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하지만 나영은 엄마와 비밀이 없기에 아직 이야기해 줄 순 없었다. 운동화는 그가 선물한 것이었다. 주변에 알리진 않았다. 멀리서 모모가 다시 말했다.
“이모! 이 운동화 색 진짜 멋져. 새로 나온 거야? 아주 진분홍이네. 정말 예뻐.”
끝. 가영과 나영의 이야기는 어쩌면 있었을 법한 평행세계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썼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