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4월은 조금 잔인한 달이었다.
2년전 4월 우리는 병결로 학교를 쉬면서 전학만을 기다렸다. 올해 4월에 정원이는 내리 결석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온 학교를 2년만에 또 떠날 줄은 나도 몰랐다. 이제 특수학교에 전학 온 정원이는 기복은 있어도 전처럼 많이 힘들어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난 다행이었다.
정원이 아빠는 과학자다. 재생원유를 만드는 연구를 한다. 정원이가 처음 입학했던 학교에서는 과학자의 날에 부모들이 특강을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4월 21일은 과학자의 날이다.
그리고 4월 2일은 세계자폐인의 날이다. (World Autism Awareness Day, 2007년부터 유엔총회에서 선언)
정원이는 만 3세 때 직장 어린이집을 다녔다. 어린이집 원장은 아이아빠에게 산타 할아버지를 부탁했다. 파티 당일, 우리는 다 같이 율동하는 아이들 뒤에서 정원이의 남과 다른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 아, 아이가 조금 다르구나. 그렇구나. 아마 아이아빠가 그것을 가장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집 원장은 이듬해, 만 4세 반은 정원이는 같이 못 다닐 것 같다고 퇴소를 권유했다.
그렇게 6년 전의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작년 크리스마스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이 안전한 내일로 이어지기만을 소원했다. 정원이는 이제 도움을 받아서 라벨프린터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일년 뒤 정원이는 특수학교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여전히 파티 느낌은 없지만 아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어 왔다. 나는 이 모든 여정이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어 우리를 안아주길, 소망하고 있다.
처음 내 아이가 자폐를 가진 걸 알았을때, 이제는 아무것도 못할 거 같다며 한탄하던 순간이 있었다. 전에는 출근 퇴근시간 비오거나 눈오면 무서워서 아이랑 센터갈때 버스나 택시 탔다. 그런데 결국은 운전이 늘고 그래서 나도 출근길 뚫고 먼 특수학교 보낼 용기가 생겼다. 운전하면서 선택과 활동의 폭이 정말 넓어졌다. 아이의 세계도 나의 세계도 꼭 그만큼 넓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앞서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전에는 늘 완벽하고 싶었고, 필연적인 불안함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메꾸려했다. 자폐를 알고 받아들이면서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실수투성이인 나를 이해하고 아이의 느림도 받아들이게 됐다다. 물론 쉽진 않았다. 그래도 전보는 세상과 싸우는 느낌이 줄었다. 전에는 대상없이 늘 화가 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감사한 이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함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기고 싶던 내가 견디는 게 꼭 지는 것만은 아니란걸 배웠다. 그리고 함부로 타인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뭘해도 끝까지 견딜 수 있었다. 웬만한 것으로는 눈 하나 깜짝 안했다. 놀랄 노자의 일들은 아이키우며 매번 겪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겪지 않으면 상상하던 그 이상의 삶이었다.
예를 들어, 머리를 부딪혀 임플란트 했던 크라운이 깨진다든가. 놀다가 발에 맞아서 안경테가 눈썹에 박힌다던가. 유리를 밟은 아이와 응급실에 간다든가. 여전히 경련하는 모습을 보는 건 무척 아팠다. 또 엄마 소리 아직 못들은 건 미련이 남아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남자아이를 키우는건 다 똑같다. 나만 별나지도 특별하지도 않았다.
오늘 밤 눈 내리는 길을 정원이 태우고 운전하면서 문득 아이가 있었기에 내가 그만큼 더 할 수 있는게 많아졌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난 지금의 내가 참 좋았다.
지난 시간동안 정원이를 키우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내 몫을 할 수 있는 만큼은 스스로 해내고 싶었다. 어렸을 때에 비하면 안정적인 삶이지만, 아이의 자폐로 인하여 가변적인 삶이 되었다. 그 위태로움 사이에서 중심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삶의 중심축은 아이 위주로 돌아갔으니까.
어리석을지 몰라도 내 손으로 아이를 거의 다 케어했다. 시댁에서는 가끔 반찬을 보내주시고, 친정엄마는 정원이를 1-2시간 봐주시려고 일주일에 한두번 오셨지만. 오로지 아이의 돌봄이 내 몫이어서 몹시 버거웠다. 지원사샘과 함께 한지 2년이 됐지만, 3-4시간 마다 아이를 보면서 컨디션 관리를 했다.
나는 공짜도움은 원하지 않았기에 꼭 무언가로 보답하고 싶었다.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원이를 낳고 나서야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내가 나라는 중심을 찾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이었다. 당장 다 타올라 재가 되어 없어질 정도로 부단히 살았다. 결국 몸이 아프게 되었다. 끝내 번아웃이 되지 않은 것은 주변의 도움 때문이었다.
지금도 내 몫의 무게는 무겁게 느껴진다. 특히 아플 때는 더 그렇다. 여전히 장애에 대해 무례하거나, 혹은 시혜하는 마음은 껄끄럽다. 그러나 연민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용서하게 했다. 나는 온기를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바뀌어갔다. 날을 세워 선의를 밀쳐내던 지난 날에 비하면 나아졌다. 어리석게 조금 손해보고 용서하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나에게 내민 온기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입학, 전학, 민원, 이사, 또 전학까지 길고 어두웠던 3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 얼어붙은 길에서 많은 인연이 끝났다. 변화무쌍한 바람 앞에서 꺼지지 작은 등불이 되어준 인연들이 있다. 그들이 가진 연민의 따스함에 감사하며, 나 역시 그에게 작은 촛불 같은 사람이 되었기를 소망한다. 때로는 그 모습이 바뀌더라도, 또 다른 형태로 인연은 이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