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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끝남으로 시작된다.

끝이 있어야, 비로소 시작이 열린다.

by IN삶

모든 것은 끝남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 논쟁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논쟁과도 닮았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엄마와의 연결이 끊기며 비로소 ‘한 사람’이 되듯,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전조다.
초등학교가 끝나야 중학교가 시작되고, 연휴가 끝나야 일상이 다시 돌아오듯이.


이번 연휴 동안 나는 엄마와 자주 부딪혔다.
반 오십을 바라보는 나와 반 백을 넘긴 엄마.
갱년기의 파도 위에 선 그녀와, 독립의 기로에 선 내가
서로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오늘,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순간
엄마가 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가장 열심히 살았던 연휴였어.”


그 한마디가 낯설 만큼 따뜻했다.
기숙사에 도착해 햇반 상자를 찍어 보내자,
엄마는 사진 속 내 손가락을 보고 “00이 손가락이다…”라며 웃었다.
괜히 울컥했다.
있을 땐 그토록 싸우던 우리가, 떨어지니 서로를 그리워한다.


전화를 하다 알게 됐다.
“조그맣던 애가 이제 독립하려고 하니까 뭉클하다.”
엄마의 그 말이 마음을 오래 맴돌았다.


아마 나도 알고 있었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그저 심심해서가 아니라 엄마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어서였다는 걸.


이 관계가 끝나야,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것이다.
익숙함은 늘 그런 것이다.
있을 땐 버겁고, 없으면 허전하다.


이제는 끝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나는 평생 엄마와 함께 살았고,
엄마는 반평생 나와 함께 살아왔다.
서로의 다음 막을 열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 2주 뒤, 시험이 끝나야 집에 갈 수 있다.
과목은 많고, 범위는 넓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해야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시험이 끝나야만 비로소 온전한 나의 시간이 온다.
그래서 오늘도 그날을 기다린다.


‘끝낸다’는 건 언제나 복잡하다.
후련함과 허무함이 동시에 찾아온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과의 이별은 괴롭지만,
하기 싫었던 일들과의 작별은 후련하다.
결과가 좋으면 행복하지만, 나쁘면 아프다.
그러나 결국,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다.


수능이 끝났을 때도 그랬다.
막막했다.
“앞으로 뭘 해야 할까?”
공부하라던 말이 사라지자, 길도 함께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수능이 끝난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라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구분해보라고.
그 시간이 새로운 시작의 밑거름이 된다고.


삶에 대한 고민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천 원에 붕어빵 두 마리던 시절을 지나
모든 것이 변한 지금,
나도, 세상도,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그래서 목표가 변하는 건 당연하다.
하나의 막이 끝나야, 또 다른 막이 열린다.


삶은 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그 덤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
단 하나, 덤이 없는 건 ‘죽음’이다.
그래서 무덤(無덤)이라 불린다.


삶의 끝을 보기 전까지 우리는 수많은 덤을 만들어낸다.
수많은 결과와 시작을 반복한다.


어제의 나는 이미 끝났다.
이제 나는 오늘의 나로 다시 시작한다.


해가 지면, 우리는 내일을 준비한다.
해가 뜨면, 다시 도전한다.
끝나야만, 비로소 또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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