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없다

계절들도, 개들도

by 유민재

처음 느꼈을 때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쯔음이다. 올여름도 덥고 습했다. 지금껏 이 여름 느낌은 보통, 사람들이 '해치웠나...?'라고 하면 '어림도 없지!'라고 돌아왔다. 그게 내가 알던 여름이었다. 그런데 이번 여름은 그 느낌이 없었다. 그냥 훅 떠나가버렸다. 아무 미련도 없이 질척거리는 것도 없이 그냥 훅.


그렇게 2주간의 가을이 찾아왔고 역시나 떠나가 버렸다. 자각을 못했지만 봄도 그랬던 거 같다. 미련 없었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왔고 겨울의 느낌도 조금 다르다. 내 지론은 서울의 추위는 짜증이 나는 추위다.


내가 살던 경상도의 추위는 쨍하게 추웠다. '우아 춥다'라는 말이 나오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그렇지 않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왠지 짜증 나게 추운 느낌이 들었다. 약간의 습기가 있는 추위랄까. 그래서 서울의 겨울을 별로 안 좋아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번 겨울은 서울답지 않게 쨍하게 춥다. 도수 높은 술을 마실 때 식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침 출근길에 숨을 들이마시면 기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쨍한 추위다. 그래서 이번 겨울은 마음에 든다.


되돌아보면 25년이 그랬다. 따스했고, 덥고, 습했고, 시원했고, 추웠다. 그런데 짜증 나지 않았고, 미련 없이 떠나가 버렸다. 이런 감정이 들 때는 나도 나에게 응당 호응해야 하기에 미련 없이 25년을 떠나보냈다. 훅.


올해는 왜인지 근자감이 생긴다. 즐거운 일들이 쭈르륵 이어질 것 같다. 아홉수라 자기 방어 기제가 발동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럴 거 같다.




존경해 마지않는 박웅현 선생님의 강연을 10년 만에 들었다. 그때는 고등학교 강당이었고, 이번에는 코엑스 별마당도서관이었다. 마음을 담아 펜레터를 썼다. 강연이 끝나고 운 좋게 독대하여 사인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싸인 밑에 한 문장을 부탁드려서 받았다.


'개처럼 살자'


말씀드리니 허허 웃으시면서 그렇게 살면 된다고 하셨다.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홍대를 걷다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분을 보았다. 그때 든 생각이 '사람이 한 걸음을 걸을 때 개는 네 걸음을 걷네' 그러고 나서 만든 문장 '사람의 한 걸음은 개의 네 걸음과 같다' 그렇지만 개들은 불평 없지. 그 산책이 생애 첫 산책인 것처럼 누릴 뿐. 26년도 그렇게 개처럼 살기로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사로 마무리해야지.


'난 나의 보폭으로 갈게'


26년은 개처럼 살자, 나의 보폭으로 가자. 그러면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을 거다. 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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