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는 어떻게 증명되는가 Part.03

순간에 머무르다

by 유민재

멀티태스커라는 단어를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는 없다. 숨을 쉬면서 물을 마시진 못하니.

정확히 말하자면 멀티태스커는 A라는 일을 하다가, B라는 일로 전환할 때 전환 효율을 높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전환 효율을 100%에 가깝게 유지하는 사람들을 슈퍼태스커라고 부른다. 인구의 약 2.5%가 이에 속한다.


많은 일들을 높은 전환 효율로 처리하는 슈퍼태스커들. 그 사람들은 '사회적 역할', '자녀로의 역할', '친구로의 역할' 등 주어진 많은 역할도 높은 전환 효율로 처리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전환 효율 수준을 몰랐을 때는 나도 2.5%의 사람이겠지 하며 동분서주했다. 아님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후에는 비관적인 선입견이 생겼다.



'일만 했던 사람은 놀 때도 일하듯 놀고, 놀기만 했던 사람은 일 할 때도 놀 듯 일한다.



이 선입견이 생긴 이유를 돌이켜보자면, 주변의 빅데이터 상 맞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던 친구는 함께 놀 때 엉거주춤 놀았고, 놀기를 좋아하던 친구는 성인이 되어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따분해 보였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던 친구는 일을 잘하고, 놀기를 좋아하던 친구는 놀 때 기깔난다.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 공부를 그다지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놀 때 기깔나게 노는 타입도 아니었다. 일과 놀이, 둘 다 잘하고 싶었지만 어정쩡했다.


스스로 맘에 안 드는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고 살던 22살 봄에, 조르바라는 미친 인간(p)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묻지 않았고, 따지지 않았으며, 재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놀 때는 평생 놀기만 한 사람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놀았고, 일 할 때는 평생 일만 한 사람처럼 머리를 박고 일을 했다. 내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2.5%의 사람이 아니다. 높은 전환 효율로 여러 가지 역할들을 해내기 벅차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내게 주어진 한 가지 역할은 제대로 할 수 있다.


일을 할 때는 평생 일만 했던 사람처럼 머리 박고 일을 할 수 있고,


놀 때는 평생 놀기만 한 사람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놀 수 있으며,


부모님을 뵐 때는 효자문을 만개 세운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친구들을 만날 때는 그 친구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내 모습을 열어제낄 수 있다.



"飢來吃飯 困來卽眠" (기래끽반 곤래즉면)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잔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하지 않느냐고 묻는 원율사의 말에 대주 혜해는(나찬 선사의 말로도 알려져 있다) "그들은 밥 먹고 있을 때 먹지 않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또 잠을 잘 때도 자지 않고 이런저런 꿈을 꿉니다. 그러니 나와 같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남긴다.


일을 할 때 친구를 생각하면 일을 할 수 없다. 가족과 있을 때 놀 생각을 하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없다. 친구와 놀 때 일을 생각하면 놀 수 없다.

당장 내 눈앞에 주어진 일에 집중하지 않고, 과거를 반추, 미래를 기우하면 현재를 살아갈 수 없다.


기자가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과 가장 중요한 사람을 얘기해 주세요"라고 톨스토이에게 묻자, 그가 답하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인터뷰입니다."라고 했다.


조르바와 대주 혜해와 톨스토이. 이들은 혼모노다.


우리의 역할은 매 순간 변형된다. 우리는 그 변형된 역할을 그때 그때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짜로 살아가곤 한다. 위에 멋진 말들을 늘어놨지만 나도 매일 잊곤 한다. 하지만 이런 나를 미워하지 않고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나'로서의 역할이다. 난 매일 이 역할에 충실한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아간다는 것은, 순간에 머무를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 순간이 증명의 순간이다. 우리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거는 없지만, 이런 태도가 더 도움 될 때는 생각보다 더 많다.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무언가가 떠나간 뒤에도 우리는 변형된 스스로를 받아들인 우리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진짜'는 어떻게 증명되는가.

성해나, 《혼모노》, 창비, 2025,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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