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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은 앤디처럼 Sep 28. 2021

우리 모두가 화보를 찍을 수 있다.

깅지니 스튜디오

사진 찍는  어렵네. 나만 그런  아니겠지?  
혹시, 카메라 앞에서 맘대로 웃을  있다면,    강해질까?


우리 집은 사진에 담긴 비화가 있다. 부모님 결혼식 때부터 시작된 사진의 저주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던 당시에, 한번 촬영했던 필름을 새것인 줄 알고 재사용한 사진사 덕에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그나마 신부 대기실에서 친구가 찍어주셨다는 초점 안 맞은 흐릿한 어머니 독사진 한 장이 전부다. 그때부터 저주는 시작됐다. 사진만 찍으면, 오래된 필름이라 사진이 안 나오고, 빛이 들어가서 안 나오고, 카메라가 고장 나서 안 나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사진 찍는 일을 포기했고, 내 어릴 적 사진도 몇 장 없다. 안 찍으니 어색하고, 어색하니 사진이 엉망이어서 나는 늘 사진 찍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학창 시절 사진은 소풍 가서 찍은 단체사진과, 졸업앨범 사진이 전부다. 가끔 친구들이 찍은 사진 속에 카메오처럼 등장한 것이 전부니까, 그만큼 사진은 나랑은 거리가 멀었다.


그런 내가 제 발로 사진을 찍겠다고? 운전면허증 갱신하라는 통지서를 받고 면허증을 보니 범죄자가 있었다. 사진에 욕심도 없고 싫어해서, 면허증 사진은 면허시험장 자판기 카메라에서 찍었던 사진이다. 어디 현상수배범 전단에서나 볼법한 굳은 얼굴에 시커먼 사진! 좀 심했다 싶어서 제대로 된 증명사진 하나 찍으려 사진관을 찾았다. 딴에 뭐든 욕심은 많아서, 정말 정말 잘 찍는 사진관을 찾겠다고 강남에 스튜디오까지 찾아갔다. 사진관 들어가는 길목에 '우리 모두가 화보를 찍을 수 있다'는 슬로건이 붙어있는데 증명사진을 찍으면서 왠지 이 말이 맘속에서 맴돌았다. 그날 찍은 증명사진에서 난 범죄자에서 꽃미남으로 환골탈태했고, 슬로건이 자꾸 생각나면서 욕심이 생겼다. 화보라고? 해볼까? WHY NOT! 안될게 뭐 있겠어?


어려운 일을 정복하면 뭔가 제 자신이 바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시엔 엉뚱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 엉뚱한 생각 중엔 어이없을 만큼 나쁜 생각도 있었다. 이혼 후 찾아온 공황장애와 우울증 때문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던 때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할 때 웃긴 것은, 죽고 싶다가 아니라, 죽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밥 먹고 할거 다 했다. 그러니까 면허증 갱신하라는 말에 사진도 찍으러 사진관을 찾았었다. 그럴 때여서, 죽기 전에 못해본 거, 내가 절대로 안 해볼 만한 거 다 해보고 그때 가서 결정할까?


저기, 저 화보 한컷이요. 저도 잘 찍을 수 있을까요?


스튜디오에서 내거는 슬로건이지만, 진짜 될까 설렘 반 의심반을 하며 작가님에게 여쭤봤다. '누구나 화보를 찍을 수 있다'는 말이 그냥 호객용 광고 카피인지 궁금했으니까.

제가 원래 광고사진을 주로 찍었어요.
그런데 매일 잘생기고 예쁜 모델만 찍으니까 재미도 없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서요.
모델이 아니어도 누구나 광고모델처럼 예쁜 사진 한컷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만든 멘트예요. 괜찮아요?

뭔가에 홀린 듯 예약을 하고 날씨 좋은 날, 출근 전 스튜디오를 갔다. 이번엔 증명사진이 아니라 '화보'다. 어떻게 찍을까? 화보 촬영은 어떻게 하는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준비 없이 사진 찍으러 갔었다. 촬영하기 며칠 전부터 고민은 많이 했어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떻게 찍어야 할지 고민하고, 안 보던 잡지에서 남자 모델들 화보사진도 봤지만 머리만 더 복잡했다. 그나마 촬영 전날 머리 자르고, 목욕재계하고, 깔끔하게 면도하고 스튜디오로 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자 여기 보세요~ 손 살짝 올리시고요. 고개 약간 좌측으로~"
찰칵!


정말 생각 없이 호라이존 한가운데에서 서있으니, 김 작가님이 이리저리 어떻게 움직이라고 포즈를 하나하나 지정해줬다. 너무 목석같이 어색하게 있으니까, 얼굴 각도, 손 위치, 손가락 각도, 표정 하나하나 잡아주는데, 화보란 이런 것인가? 이렇게 어려운 건가? 마네킨이 된 듯하고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앤디님! 경직되면 어깨가 올라가요.
그러면 목이 짧아지니까 어색하고 얼굴도 커 보여요.
힘 빼 보세요~그렇지! 그거예요! 잘하시네요! 조금만 더~ 네~ 나이스~
찰칵!


아! 어깨에 힘들어가면 사진이 예쁘게 안 나오는 거구나. 자꾸 힘 빼라고 하시는데,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 정도로 정말 힘을 다 뺐는데도, 아직도 힘이 들어갔다고 한다. 뭘 어떻게 할라는 말일까? 힘은 빼고 긴장은 하지 말고, 하지만 자세는 바르게 하고 마치 식당에서 2인분 같은 1인분 달라고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받는 사장님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이게 화보 촬영인지, 포즈 수업을 듣는 건지 모르겠다.

 

니트를 손끝으로 잡아보세요. 좀 더 사이즈가 컸으면 좋겠는데.
지금 옷은 몸에 딱 맞으니까, 일단 좀 당겨서 잡아보실래요? 네~ 좋아요~!
찰칵~!


정말 잘하는 거 맞는 걸까? 뭐만 하면 그냥 다 좋다고 하는데 영혼 없는 멘트처럼 들린다. 너무 얼어있으니까 립서비스로 자신감 가지라고 해주는 걸까? 시 킨는데로 손끝으로 니트를 잡고 입술 근처로 손을 끌어올리고 미소를 지으라니 어쩌라는 걸까? 갑자기 예전 초록매실 광고에서 조성모의 그 수줍어하는 표정연기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니, 정말 손발이 다  오그라 들어서 없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묘한 쾌감이 서서히 생긴다. 내가 나 같지 않고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표정 지으며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사진을 찍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보정을 하는데 잔머리를 지우고, 피부를 매끄럽게, 눈은 초롱하게 좀 타이트하게 보인 옷은 여유 있어 보이게 쓱쓱 보정이 되는 모습이 신기하다. 사진 나온 대로 피부를 관리하고, 옷 사이즈도 저런 핏이 나오게 사면 스타일이 더 좋아질 것만 갔다.  


다른 건 다 바꿔도 바꾸기 힘든 건 얼굴에 담긴 표정과 눈빛은 보정이 힘들었다. 사진 속에 내 미소가 아직도 어색했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피하는 모습들이 가득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눈길을 피하는 것처럼, 불편함이 느껴졌다. 사진 속 내 표정과 분위기, 눈빛 그리고 생각은 단지 보정만으로 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변해야 사진이 잘 나오겠지. 반대로 내가 정말 자신감 넘치면 어떤 사진이 나올까? 카메라 앞에서 서있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불편한데, 나만 그렇지는 않겠지? 증명사진 잘 찍었다는 사람 못 봤으니까. 그러면 카메라 앞에서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포즈를 할 정도가 되면, 나도 좀 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 정말 그럴까? 계속 찍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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