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산 Jan 07. 2020

웰컴 투 더 토익 정글

종로에서 토익 강의를 한다는 건 2.0

Kaaba, emojipedia.org

우리는 언제나 이상향을 만든다.


그 이상향은 시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리고 환경에 따라 바뀐다. 고등학생 때 나의 이상향은 대학교 합격이었다. 대학교에만 가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학생 땐 다이어트 성공이 이상향이었다. 다이어트만 성공하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행복할 줄 알았다. 살만 빼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다. 70kg에서 49kg까지 감량해봤지만 세상도 나도 그대로였다. 언제나 꿈꾸던 이상향에 막상 도달하면 전혀 이상적이지 않다는 걸 우리는 매번 경험하면서도 또다시 달콤한 이야기를 지어내어 스스로를 속이고 새로운 이상향을 만든다.


토익강사 1년 차, 그 시절 나의 이상향은 YBM, 해커스, 파고다에서 강의하는 것이었다. 내 주변 대부분이 아는 학원, 우리 부모님까지 아는 학원이 바로 내가 가야 할 곳이었다. 나의 첫 번째 토익학원이었던 테스트와이즈시사어학원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이었기 때문에 나의 유토피아, 나의 도원경 YBM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뛸 듯이 기뻤다.(해커스와 파고다에도 지원했었지만 가차 없이 떨어졌다)


나의 첫 YBM 원장님은 10년도 넘게 그 자리에 계셨던 분이었다. 원장님은 첫 만남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학생이 많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여기 계시는 유수연 선생님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 내가 YBM 종로 e4u에 들어갔던 2009년에 나의 롤모델 유수연 선생님도 그곳에 계셨었다! 나를 토익 세계로 인도한 꾸란과도 같았던 "20대,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를 쓰신 토익계의 무함마드, 유수연 선생님! (하지만 막상 학원에서 실제로 뵌 적은 거의 없다. 딱 한번, 선생님과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수업이 있던 어느 토요일, 엄청나게 커다란 강의실을 쓰시는 유수연 선생님께서 그의 1/10도 안 되는 내 강의실로 오시더니 "의자가 모자라서 그러는데 몇 개 가져가도 될까요?" 내 수업은 이미 끝난 후였기 때문에 너무나 선뜻 "네, 네. 가져가세요!" 그랬더니 어디선가 나타난 여러 명의 숙련된 조교들이 책걸상 몇 개를 빠르게 가져갔다)


이상향에서 롤모델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 인생에 이제 남은 건 탄탄대로(요즘 말로 꽃길)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강의를 시작하고 나니 역시 이상향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출근하는 곳만 바뀌었을 뿐, 무명의 초보토익강사는 그대로 초보토익강사였다.  몇 개월이 지나도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토익의 메카, 종로에서도 카바 신전이라고 할 수 있는 YBM이었지만, 토익의 꾸란을 쓰신 유수연 무함마드 선생님이 계셨던 YBM이었지만, 그건 그거였고 나는 나였다.


10년 경력의 동료 토익 선생님께서 종로 YBM은 정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적자생존의 환경이기 때문이다. 사실 종로 YBM만 정글이라고 할 수 없다. 어느 학원이든 강사들이 서로 치열하게 물고 뜯고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정글일 것이다. 학원이 강사에게 이상향이 아닌 정글인 이유를 간략히 정리해보자.(아래 내용은 나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기에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1. 강의실 외에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마커, 화이트보드 지우개와 같은 문구에서부터 마이크, 스피커, 케이블 등 수업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강사가 다 준비해야 한다. 요즘은 대부분의 강사들이 빔프로젝터에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연결하여 수업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2010년까지만 해도 마커가 없으면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학원 근처 문구점에서 대량으로 마커를 구비 놓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2. 홍보는 100% 강사 몫

수업만 생각하고 학원에 들어갔다가 프로필 사진 촬영, 포스터 제작, 네이버 홍보(요즘은 인스타나 유튜브)등을 다 알아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초보강사들은 하나같이 당황한다. (나도 그랬다. 기존 포스터들이 멋져 보이지 않아 내가 직접 포스터를 제작했다. 그때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Jason Mrazd의 We Sing. We Dance. We Steal Things 앨범 커버를 "오마쥬"해서 만든 포스터다.)


Jason Mrazd의 We Sing. We Dance. We Steal Things (왼쪽)와 나의 첫 토익 포스터 이미지(오른쪽), source: Wikipedia


3. 강의실 경쟁

강의실은 학생수에 맞게 배정받는다. 학생이 많으면 강의실도 커지고 학생이 적으면 강의실도 작아진다. 때에 따라 몇 개의 강의실이 합쳐지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문서 작업할 때 표의 셀끼리 합치거나 분리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강의실의 벽이 어떤 자재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며칠 사이에 강의실 2개가 1개가 되고, 1개가 2개가 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것은 누군가의 강의실 규모가 2배로 늘어남과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의 강의실은 1/2이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학원에서 수강생이 제일 많은 강사와 수강생이 제일 적은 강사는 강의실 경쟁을  필요가 없다. 수강생이 제일 많은 강사는 무조건 제일  강의실을 쓰면 되고, 제일 적은 강사는 1개월에서 3개월 주기로 누군가는  그만두거나 새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강의실 경쟁이 가장 치열한 그룹은 서열 2위부터 뒤에서 2위까지이다.  그룹 안에 있는 토익 강사들은 어떻게든 책상이 하나라도 많은 강의실을 차지하기 위해 원장님께 찾아가 팀의 가능성을 어필한다던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음원 사재기처럼) 자신의 신용카드와 지인들의 아이디를 이용하여 본인 수업의 수강 신청해놓는다던지. 강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의실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아마 대형 토익 학원을 다녀본 사람들은  달의  15일쯤 되면 강사가 다음  수강을 유도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다음달 수강이 시작되고 일초라도  빨리 수강인원을 확보해놔야 강의실도 확보할  있기 때문이다. 토익강사에게 강의실 경쟁은 의자 뺏기 게임과 다를  없다.


+ 강의실 일화

YBM에서 나에게 처음으로 배정해준 강의실 규모는 12석이었다. 지금 학원 건물은 2013년인가 리뉴얼되어 모든 강의실에 빔프로젝터가 설치되어있고 엘리베이터도 있는 현대식 건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전엔 엘리베이터도 없는, 80년대에 지어진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박물관 느낌의 건물이었다. 나의 12석 강의실은 옥탑방 내지는 다락방 같아서 가끔 강의 도중 학생들이 지루해하면 전쟁영화에서처럼 다락방에 몰래 숨어 어떻게든 공부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종로는 경찰차와 소방차가 정말 자주 지나가는데 밖에서 사이렌 소리까지 들리면 정말 영화 속 다락방이었다.


4. 적자생존

적자생존(適者生存: 환경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현상.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가 제창하였다.-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정글의 법칙(김병만 나오는 거 아님)이 적용되는 종로토익학원. 적자생존의 의미 속 몇 가지 개념을 좀 더 짚고 넘어가자.

- 환경: 학원 건물과 강의실뿐만 아니라 학원의 모든 요소를 말한다. 수강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원장님, 부원장님, 실장님, 총무님 등 모든 행정실 직원들과 경비원님, 미화원님, 심지어 교재 제작을 맡기는 인쇄소 사장님까지. 이 모든 환경을 인지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 적응: 토익강사로 잘 적응하려면 먼저 학원의 행정실 직원들과 가까워져야 한다. 물론 비즈니스 관계이기 때문에 친구처럼 친해질 순 없지만, 원장님이나 실장님과 자주 면담하는 강사들은 그렇지 않은 강사들에 비해 더 오랫동안 학원에서 강의하는 경향이 있다. 변화하는 홍보 트렌드에도 잘 적응해야 한다. 과거에는 네이버 파워링크에 모든 홍보비를 쏟았다면, 이제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각종 커뮤니티 등 다양한 채널에 투자해야 한다.

- 생물: 보통 토익은 두 명의 강사가 한 팀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은 듣기(LC), 한 사람은 읽기(RC)를 담당하는데 혼자서 둘 다 맡을 수도 있고, 어떤 학원은 강사 둘이 하는 수업보다 한 명이 하는 수업에 수강생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이것도 역시 환경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강사들은 그에 맞춰 둘이 되기도 하고 셋이 되기도 하고 하나가 되기도 한다. 혼자서 하는 건 상관없지만, 둘이나 셋이 한 팀이 되면 팀워크가 문제가 된다. 종로에 10년 동안 있으면서 팀 내 불화로 깨진 팀을 정말 100번은 넘게 본 것 같다.(나만 해도 팀이 7번이나 바뀌었으니까)

- 도태, 멸망: 보통 종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학원을 그만둔 강사들은 강남, 신촌의 학원으로 간다.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면 비교적 학원 수가 적은 인천, 경기 지역이나 광역시로 내려가 그곳에서 강의를 한다. 그곳에서 오히려 잘 된 경우도 많이 봤다. 학원이라고 해서 꼭 종로, 강남, 신촌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해야만 하는 학원의 입장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강사의 근무환경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많은 강사들이 공평한 기회를 갖기를 바라며.(마지막은 훈훈하게 마무리)

매거진의 이전글 토익은 장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