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킬라의 추억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by 끌로이

#1 술을 부르는 그림을 봤다


나에게는 보고 있으면 술이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나는 무슨 일이든 계획부터 세우는 대문자 파워 J이다.
그런 내가 갑자기 계획에 없던 퇴사를 했다.
인생의 모든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결국 인생의 굵직한 순간들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게 또 인생이니까.


갑자기 백수가 된 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퇴사를 하고 어영부영 몇 달이 지난 어느 초가을 오후.
취미로 준학예사 필기시험을 봤을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기에 그동안 읽지 못했던 예술서를 실컷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일 때 주문했지만 계속 책장에만 꽂혀 있던 서양 미술사 책 하나를 무심코 펼쳤다.

남편이 출근하고 난 집은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와 시계의 초침 소리가 이렇게 컸었나 싶을 정도로.

독일 낭만주의 챕터를 읽고 있을 때였다.
그림 속 한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 높은 산 정상, 검은색 정장을 입은 신사가 서 있다.
한 발은 바위 위에 올려둔 채 지팡이를 짚고 있다.
그의 앞에는 안개 구름으로 덮인 광활한 자연이 펼쳐져있다. 구름 사이로 솟아오른 바위의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위태롭고 장엄하다. ]


하지만 신사는 등을 보이고 서 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림은 바로 카스퍼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였다.
무슨 이유인지 이 그림은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술을 마시고 기억을 잃었다.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2 죽음을 품고 살았던 화가 – 카스퍼 프리드리히


카스퍼 프리드리히는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중요시한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는 주로 자연의 숭고함을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인간과 대자연의 대비가 강한 작품이 많아

단순한 풍경화라기보다 인간 존재에 대한 화가의 사유가 짙게 느껴진다.

그것은 프리드리히가 살아온 인생과 깊은 연관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수차례 가족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는 평생 죽음에 대한 생각을 품고살 수밖에 없었고,
그런 고독함과 쓸쓸함이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프리드리히의 작품 속 인물들은 뒷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구조적 장치를 뤼켄피겨라고 한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뤼켄피겨 작품이다.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달맞이 1822



프리드리히, 창가의 여인 1822



인물들이 등지고 있어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느낌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관객은 작품 속 인물과 같은 시선을 갖게 되어
마치 그림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된다.

다른 말로, 작품 속 인물은 곧 관객 자신이 된다.
그래서 관객에 따라 이 그림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그날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던 걸까…?



#3 데킬라에 취한 밤


이 그림은 초조하고 불안했던 내 30대 중반의 초상화였다.


나 역시 그림 속 주인공이 내 자신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계획에 없던 퇴사를 한 내 자신이 등지고 서 있는 신사였고, 인생의 다음 챕터가 보이지 않던 상황이 곧 안개 바다였다.

스스로 작아진, 매우 불안하고 공허한 시간에
이 그림은 나의 현실과 정.면.충.돌해 버렸다.
제목의 ‘방랑자’라는 단어가 잔인할 만큼 정확한 타이밍에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증폭했고, 그날 밤 나는 술, 정확히 말하면 데킬라와 함께 나의 존재와 인생에 대해 수많은 의문을 품고 힘들어했다.

나에게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슬프게도 그 당시

나의 현실을 상기시키는 그림이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목표를 달성한 성취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방랑자의 뒷모습은 세대를 넘나들며, 시대를바꿔가며 수 많은 메시지와 질문을 계속 던질 것이다.
그것이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온 명화의 힘이니까.

다음 날 술이 깨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그림이 나를 술 먹인 주범이라는 것을….

숭고한 자연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그린 프리드리히의 작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통했던 것이었을까?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이 그림을 보면

안개 바다보다는 데킬라가 먼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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