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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Sep 03. 2023

표리부동 카파오무쌉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열 번째

오전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동료가 내 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업무상으로 나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 가끔 일이야기를 하는 몇 안 되는 동료 중 하나다. 오늘은 무슨 일인가 해서 동료의 얼굴을 보면서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뜬금없이 요즘 내 표정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갑자기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이게 인사치레인지 진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동안 연습했던 작은 자신감들이 모여서 정말로 표정이 좋아진 걸까 궁금하지만 그런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길게 이야기할 재주가 없다. 어색해하는 내 모습을 본 동료는 살짝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그게 끝이었다. 하루종일 두세 마디도 하지 않는 회사에서의 내 평화는 인정 어리고 인류애 넘치는 한두 사람들이 정말 선한 의도로 하는 말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다. 아무 기대도 없었을 때에는 평화롭지만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생기는 순간 마음의 평화는 깨어진다. 아직까지 내 마음은 그런 낯선 방문을 허락할 정도의 강함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점심 먹으러 나가자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쑥 일어나서 따라가 본다.


자주 얘기하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는 서울에서도 핫플레이스에 위치한 덕에 줄 서서 먹는 식당들이 많은 편이다. 최근 들어서는 모든 음식점들이 줄을 서는 모양새이다. 평소 자주 이용하던, 그럭저럭 장사만 겨우 되던 식당들도 길게 줄을 늘어서기 시작하니 갈 곳을 찾기 힘들다. 


괜히 따라 나왔나 싶을 정도로 아무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힐끗힐끗 돌아서 날 쳐다보는 오전의 그 동료는 그 표정을 알 수가 없다. 자기 탓에 내가 따라오게 되었음에 자책이라도 하는 걸까? 조용히 무리를 따라가 보니 태국음식점도 도착했다. 아마 자기들끼리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출발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람이나 많지 않아서 빨리 먹고 회사로 돌아갔으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2층에 있는 식당에는 계단까지 사람이 가득하고 우리 앞으로도 몇 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라면 당연히 기다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겠지만 그들이 원치도 않는 자리를 내 맘대로 착각해서 따라왔는데 이제 내 기분이 나쁘다고 다시 돌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티를 안 내고 가만히 기다렸다. 다들 무슨 할 얘기가 저리 많을까 종알종알 쉴 새들이 없다. 가끔 '그렇지 않나요?'하고 동의를 구하는 말정도가 떨어지면 홀로 무간지옥에 있던 나는 천국에서 떨어지는 성수를 마시는 듯 허겁지겁 받아먹는다. 하지만 그런 건 평생 기대하지 않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계단에 서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풍의 가게는 너무 좁고 테이블과 의자들은 서로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붙어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자리에 겨우 동료의 어깨가 닿지 않게 앉았다. 메뉴판을 받았는데 며칠 전 쌀국수를 먹은 기억이 났다. 달리 아는 음식도 없는 나는 메뉴판을 정독해서 먹을 만한 메뉴를 찾아냈다. 카파오무쌉이라는 태국식 돼지고기 볶음 덮밥으로 사진으로 보기에는 호불호 없이 먹을 만한 모양새였다. 건더기가 굵직하게 갈린 돼지고기를 고추, 시금치와 같이 볶아서 밥 옆에 올리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려서 내어주는 태국식 제육덮밥이라고 메뉴판에 쓰여 있었다. 점심시간부터 이빨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는지 걱정하며 회사까지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요리들은 사진만 봐도 별로 먹고 싶지가 않았다. 제육덮밥 정도라니 그나마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 나온 음식은 맛과는 별도로 내게 실망감을 주었다. 이 덮밥 요리의 내어주는 바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사진을 보면 볶은 고기가 밥 옆에 모아져 있고 밥 위에 계란프라이가 올라가 있었는데 나온 것은 밥 위에 고기 볶은 게 바로 올려져 있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가 올라가져서 나왔다.  덮밥은 보통 양념이 많기 때문에 밥 위에 요리를 얻으면 밥이 온통 양념범벅이 돼버린다. 그게 무슨 차이냐고? 어차피 섞어먹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난 대부분 음식을 섞어 먹지 않고 밥 위에 반찬처럼 올려서 먹는다. 제육덮밥을 시킬 때도 혹시 가능한지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따로 주실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 하얀 쌀밥에 양념된 요리를 얹어먹는 게 맛있다. 쌀밥의 고소함과 양념된 요리의 화려함이 입속에서 만나야 비로소 플러스가 된다. 더구나 기름에 볶은 요리를 밥 위에 얹으면 양념된 기름이 밥 위로 다 스며들어 느끼해져 버린다. 고기 맛도 밥 맛도 모두 기름에 묻혀버린다. 더구나 난 기름이 많은 것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 동료와 어깨가 닿을까 신경 쓰고 기름진 밥까지 걱정하고 있으니 벌써 배가 아파온다. 


덮밥으로 나와버린 카파오무쌉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계란 프라이를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살짝 옆으로 치우고 밥 위에 있는 고기들을 걷어서 접시 한쪽으로 모은다. 그리고 양념과 기름이 많이 묻어있는 밥들을 걷어서 역시 접시 한 칸으로 모아둔다. 젓가락으로 한 땀 한 땀 한참 작업을 한 후 양념과 기름이 덜 뭍은 밥이 드디어 나왔다.  숟가락으로 밥을 푸고 그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먹어본다. 


한입 먹어보니 매콤 짭짤하니 너무나 한국적인 요리였다. 현지에서도 이런 맛일까 아니면 한국에 와서 입맛에 맞춰진 건가 궁금했을 정도로 제육볶음 같았다. 몇 번을 먹다 보니 바닥에 고여있는 기름과 양념에 푹 적셔진 밥이 나오고 난 더 이상 먹기를 그만두었다. 동료들은 이미 본인들 음식을 다 먹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편하게 천천히 먹으라는 얘기가 없다. 갑자기 다시 배가 아프다. 기름양념만으로도 배가 아픈데 눈치까지 얹어 먹고 있으니 장이 뒤틀리는 듯하다. 


내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동료들은 말없이 일어났다. 나는 뒤틀린 장을 바로 잡기 위해 내가 처음 맛본 이 음식에 집중했다. 음. 맛은 있지만 노력에 비해 먹기가 힘든 요리였다. 내가 유별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다음에는 볶은 고기를 따로 내어 달라고 할까 생각해 보지만 아마 난 용기 내서 물어보는 어려움을 회피해서 다른 음식을 주문할 것이다. 사진에 나온 대로 밥옆에 올려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거절의 두려움이 용기를 앞선다. 거절당했을 때 동료들의 얼굴을 볼 자신은 더더욱 없다. 


내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소극적인 정신으로 어렵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극복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굳이 음식을 먹으면서까지 고난 극복을 하고 싶지는 않다. 사진과 똑같이 내어주면 되는 일을 왜 내가 고생을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음식점 계단을 내려왔다. 밖으로 나오니 동료들은 벌써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속은 좀 편해졌지만 호전된 증상을 얘기할 사람도 없고 해서 길을 따라 조용히 회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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