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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Aug 18. 2023

외로운 순대국밥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네 번째

새벽 5시 40분에 알람이 울렸다. 잠을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지만 다섯까지 숫자를 센 다음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다시 정신을 읽고 쓰러졌던 것 같다. 다시 알람이 울린 건 6시 20분이었다. 일어난 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반복적인 습관을 만들려고 사소한 규칙들을 계속 만들고 있다. 그중 아침에 해야 하는 일은 6시 전에 일어나기,  이불 개기, 모닝커피 안 마시기이다. 아주 사소하고 쉬운 행동들을 매일 실행해서 성공하는 루틴을 만들려고 하는 데 역시나 쉽지 않다. 하나하나는 쉽지만 모아보면 매일 하기가 꽤 어렵다. 


6시 20분에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했다. 머리카락이 있는지 베개와 머리맡을 끈끈이돌돌이로 구석구석 밀어주고 베개를 제자리에 놓고 이불을 반듯이 펴서 요 위에 올려놓는다. 침대가 있지만 바닥에 요와 이불을 펴고 자고 있다. 침대에서 자면 잠깐 잠들 때마다 악몽을 꾸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침대가 좁아서 떨어질까 봐 불안한 것 같기도 하다. 멀쩡한 침대 옆에 요를 깔고 자면 의외로 아늑하다. 그래도 잠이 잘 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잠을 못 자는 것뿐이지 안 졸린 것은 아니다. 졸린 머리를 깨우기 위해 차가운 물을 꺼내 먹었지만 속만 불편해졌다. 30분이나 늦게 일어나서 회사에는 이미 지각이 확정인지라 그냥 천천히 나가기로 결심하고 믹스커피 한잔을 타서 식탁의자에 앉았다. 오늘도 모닝커피 안 마시기는 실패다. 달짝지근한 믹스 커피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내 주변의 풍경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싱크대에 정리된 식기들, 아무도 앉지 않아 항상 새것 같은 소파, 책들이 가득 있는 책장,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테이블. 아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았다. 테이블에는 어제 먹은 듯한 국그릇이 올려져 있다. 숟가락이 꽂혀 있는 국그릇에는 1/3쯤 국물이 남아 있고 그 밑으로 깔린 밥이 보였다. 국그릇도 일반적인 그릇이 아니라 뚝배기다.


난 먹고 바로 치우는 습관을 가졌고 특히 음식물로 인해 벌레가 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싱크대에 음식물 분쇄기까지 달아서 먹고 남은 음식물들을 바로바로 처리해 왔다. 그런데 국그릇에 먹다 말은 밥이라니. 거기에 수저까지 꽂혀있다니 이런 게 내 집 테이블 위에 있는 거 자체가 이상했다.

 

꽂혀있는 숟가락으로 저어보니 고기 건더기 몇 개와 밥알들이 돌아다녔다. 국그릇을 가지고 싱크대로 가서 음식물을 전부 분쇄기에 갈아버리고 찌꺼기를 제거했다. 국그릇을 닦다 보니 어제 밤에 순대국밥을 포장해 온 게 생각이 났다. 토렴 한 순대국밥이 먹고 싶어서 가게를 찾아다녔지만 그런 곳이 없어서 순대국밥을 포장해 왔었다. 아니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별다른 기억은 없고 먹다 남은 뚝배기만 있는 것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진통제 한 알을 삼키고 집을 나왔다.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테이블 위에 놓인 순대국밥이 자꾸 생각이 났다. 토렴이란 단순히 밥에 국물을 얹어서 주는 것은 아니다. 밥이나 고기등 내용물에 따듯한 국물을 부었다가 따라내길 반복해서 음식을 덥히는 과정을 거친다. 개인적으로 토렴의 가장 좋은 점은  국물이 너무 뜨겁지 않고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국밥들은 펄펄 끓는 뚝배기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너무 뜨거운 탓인지 밥을 말아서 나오지 못하고  따로 공깃밥이 나온다. 일명 따로국밥이지만 대부분 이런 형태로 나오기 때문에 따로국밥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적당한 온도에 적당한 양의 밥이 말아져 있는 진짜 국밥들을 보기 어렵다.


내가 국밥이라고 불리는 것 중에 가장 자주 먹었던 것은 순대국밥이다. 국밥 중에 저렴한 편에 속하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먹어온지라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다. 순대국밥은 이름의 평범함에 비해 너무 많은 버전이 존재한다. 순대와 고기를 주는 곳, 고기대신 내장이 있는 곳, 피순대를 주는 곳, 찹쌀순대인 곳, 당면 순대인 곳, 육수가 탁한 곳, 맑은 곳 등등 가게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동네에 순대국밥집 하나 없는 곳은 없었다. 골목 한자리에 비릿한 돼지고기 냄새가 나는 작은 순대국밥집에는 일을 끝나고 저녁을 먹는 손님들로 좁은 가게 안이 항상 가득했다. 작고 오래된 순대국밥집들은 점점 세월에 치여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순대국밥을 해장국집이나 국밥전문점에서 팔거나 잘 모르는 신식 프랜차이즈들로 바뀌어 갔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도 토렴을 해서 팔지 않는다. 적당한 온도의 국물에 살짝 퍼진 부드러운 밥은 기대조차 하기 어렵고 해장국 국물에 대충 순대와 고기만 넣어주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마저도 따로 나오는 공깃밥은 어제 한 것인지 딱딱할 때도 많다. 내가 뭔가를 거창하게 원하는 것은 아니다. 토렴 한 순대국밥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내려놓았다. 그냥 찹쌀순대에 내장이 적당히 들어있는 순대국밥이면 되는데 요즘 대부분은 순대도 그냥 당면순대이고 내장이 있는 곳은 드물고 고기는 비계덩어리만 있은 경우도 있다. 내장손질이 의외로 어렵고 냄새가 날 수도 있어서 요즘은 고기만 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럼 그 옛날에는 어떻게 그 어려운 작업들을 하면서 순대국밥을 팔았을까? 아마도 기본시급도 못 받던 우리네 어머니들이 그 모든 것을 했을 것이다.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힘들어도 묵묵히 말이다. 매일매일 재료를 씻고 다듬고 삶고. 더이상 손이 움직이지 못할때까지 더이상 일어나지 못할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순대국밥이 만원을 넘어가면 잘 먹지 않는다. 값비싼 프랜차이즈에서 먹기 싫다는 뜻이고 실제로 그런 곳에 가서 먹었을 때 순대국밥이라기보다는 순대를 사용한 어떤 요리를 먹은 느낌이라 진짜 순대국밥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 순대국밥이 선택 실패가 가장 많은 음식이 되었다. 해장국집에서는 절대 순대국밥을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들어가도 혹시나 하고 시키는 마음. 어느 곳도 내 취향대로 팔지 않는다. 그런 순대국밥을 원하는 게 마치 나만이였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보통 음식에 대한 기대가 많지 않은데 순대국밥은 이상하게 맛뿐만 아니라 가격까지 머릿속에 기준이 정해져 있어 그 기준에 통과하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지나고 돌아보면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변해간다. 몇십 년간 변치 않는 맛집이 사실은 세월에 따라 계속 레시피를 바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잘 변화하지 못하고 혼자 제자리에 머물 때가 많다. 주변이 끊임없이 변해버려도 미련스럽게 한자리에 남아있곤 한다. 모든 것이 세월에 맞춰 계속 바뀌어가는데 사람들과 같이 따라가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나도 어느 정도는 변하겠지만 주변에 맞춰 시나브로 변해간다기보다는 어떤 임계점까지 머무르다가 댐이 무너지듯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갑자기 변해 버린다. 그 변화가 갑작스럽고 속도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세상이 시나브로 변해감에 따라 가지는 동질감을 못 느끼고 혼자 버려져 있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러다 한순간에 따라잡는다 해도 지나온 추억이 달라 공감하기 어렵다. 나는 항상 공감하는 척한다. 얼굴을 찡그리고 웃으며 박수도 치고 한껏 호응해 주지만 공감이 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변화는 내 주변을 자주 스쳐 지나가 버린 다는 것이고 되돌리기는 불가능하다. 그저 시간에 다다르면 무너져 내릴뿐이다.


순대국밥처럼 단순해서 금방이라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것 같은 것들도 실상은 매일 매일 변화하고 달라지며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기 쉽지 않다. 애초에 원래 모습이라는 것도 그냥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 불과하다. 변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서서 계속 미루어오다 한꺼번에 폭발해버리면 주변이 무너져버리고 갑자기 난 현재로 떨어진다. 그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순대국밥을 과거에 묻어버리고 돌아보지 않게 될 것이다. 나의 변화는 자연스러움이 없다. 언제나 그래왔다.


새로운 순대국밥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21세기 대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쯤 되면 나의 20세기가 무너지고 새 시대를 맞게 될까? 이번에 무너져 버리면 나는 어느 시대에 남겨질까.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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