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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Aug 22. 2023

무뚝뚝한 샌드위치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다섯 번째

나는 미련하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미련하게 꾸준히 반복해서 하는 건 잘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속 노력을 해야 하는 일이면 금방 포기해 버린다. 하프마라톤 준비를 위해 매일 만보 걷기, 몸무게 5kg 중량을 위해 하루 두 끼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먹기, 입병 예방을 위해 매일 비타민제 먹기 등등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실패에 대한 방어기제가 작용하며 포기를 위한 수백 가지 이유들을 만들어낸다. 그것도 정말 합리적인 이성의 목소리로 포장하여 날 포기시킨다. 하지만 단순반복하는 일들은 꽤 금방 습관을 가진다. 사과는 깎아서 6등분을 해서 먹고 남은 피자는 비닐봉지와 지퍼백을 둘 다 사용하여 이중으로 넣어서 냉동시키며, 냄비에 혼자 먹을 국을 끓여도 꼭 국그릇에 따로 퍼서 먹는다던지 하는(혼자 먹는 라면도 그릇에 담아야 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은 꾸준히 하게 된다. 마음의 부담이 없는 일에만 미련하게 반복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현재 이 상태에서 나아지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매일 할 일을 정해서 꾸준히 하는 것이었다. 자기 전에 약 먹기, 눈감는 시간정하기, 일어나는 시간 정하기, 이불 정리하기, 세끼밥 먹기 등등 어떤 목표가 없고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들로 목록을 만들었다. 목표가 없기 때문에 큰 부담이 없다. 예를 들어 하루 세끼 먹기의 경우도 건강을 위해 세끼를 챙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 빵, 과자를 먹어도 좋고 오후에 세끼를 먹어도 좋으니 하루에 세 번 식사만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아무 목표 없는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 매일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매일 계속하면 작은 성공들이 쌓여 자신감이 조금 붙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자신감이 없으면 어떤 것도 지속할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 앞서 난 자신감을 찾아야 했다. 작은 습관들을 성공하면 자신감이 생겨 사람들 앞에서도 덜 주눅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조금씩 성공하는 일이 늘어나고는 있는데 아직까지는 그게 맞는 방향인지 잘 모르겠다. 결과를 알 수 없는 날들이 계속 흘러가며 내 마음을 자주 수면아래로 가라앉힌다. 회사는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나는 사람들의 아무것도 아닌 반응에도 하루종일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간다. 내 마음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사람을 대할 때 주눅 드는 빈도가 줄어들지 않는다. 아니 나이 들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난 나보다 덩치가 큰 사람이랑 얘기할 때 주눅이 드는 경향이 있다. 어릴 때 어른에게 맞은 기억이 있나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낯선 사람일수록 더 심해서 음식점에 갔을 때 주문받는 사람이 덩치가 크면 번개처럼 주눅이 들어 말할 때 계속 버벅 거린다. 


꽤 오래전에 회사 업무상 출장으로 캐나다를 길게 가야 했던 적이 있다. 숙소를 잡아야 했는데 출장지 근처에 숙소가 없어서 꽤 먼 곳까지 나가야 했다. 차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나가서 잡은 호텔은 1층으로만 이루어진 특이한 곳이었다. 식당도 없고 자판기만 몇 개 있는, 미국식 모텔에 가까운 곳이었다. 막내이다 보니 식당에 대해 항상 고민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선배들이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이 있나 싶어 주변을 찾아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중국식 뷔페와 샌드위치 가게가 하나 있었다. 밖에 나가서 먹기 어려울 때는 샌드위치를 포장해서 먹고 저녁에는 중국식 뷔페에서 술과 밥을 동시에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더구나 미국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주인공들이 샌드위치를 사무실 자리에서 먹는 장면조차 멋들어지게 나왔기 때문에 샌드위치가게를 발견해서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서브웨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샌드위치 집이었다. 샌드위치는 한국에서도 친숙한 음식이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 그런데 내부는 내가 생각하는 샌드위치집이 아니었다. 메뉴판에는 정말 많은 샌드위치 메뉴가 있었고 그 아래로는 유리로 되어 속이 보이는 냉장고가 거의 좌우 끝까지 길게 놓여 있었다. 각양각색의 햄, 처음 보는 치즈들과 정말 많은 야채들, 뭐가 뭔지 전혀 모르는 각종 소스들이 냉장고 안에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주인장은 2미터가 넘어 보이는 거인이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거인은 들어오는 나를 보고 인사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메뉴를 보았다. 기적과도 같은 말이 쓰여있었다. 


Today Menu. 


살았다 싶어 투데이 메뉴라고 말했다. 그래도 거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정말 용기를 내서 다시 얘기했다. 투데이메뉴 쓰리. 죽을 듯한 용기를 내서 편 손가락 3개를 본 건지 만 건지 거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포기하고 나가려는 순간 한참을 날  쳐다만 보던 거인은 갑자기 빵을 꺼내고 샌드위치를 만들 기 시작했다. 빵을 벌리고 치즈를 얹어 오븐에 데우고 햄과 야채를 넣고 소스를 뿌린 뒤 종이에 돌돌 말아 플라스틱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순식간에 3개가 만들어졌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포스기에는 가격이 찍혀 있었고 난 몇 달러를 지불하고 개미 같은 목소리로 잔돈은 괜찮다고 겨우 말하고 나올 수 있었다.


 다시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샌드위치를 들고 회사에 갔다. 선배들이 한식이 먹고 싶다는 걸 샌드위치를 주고 도망치듯 휴게실로 혼자 나왔다. 너무 오래 끓여서 쓴맛만 남은 커피 한잔을 들고 햇빛이 비치는 직원휴게실 테이블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처음 종이 포장을 벗겼을 때 들었던 느낌은 이걸 어떻게 먹지 싶을 정도로 크기가 컸다. 무엇보다 야채가 너무 많아서 한 입에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냐. 쌈의 민족 아니던가. 엄청 큰 쌈을 먹는 샘치고 입을 최대한 벌려 먹기 시작했다. 소스는 아래로 줄줄 흐르고 야채는 옆으로 터져 나갔다. 그런데 너무 시원하고 맛있는 것이었다. 샌드위치를 맛으로 먹어본 적이 없었지라 서브웨이 샌드위치의 맛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끝까지 먹어치우고 나니 배까지 불렀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새벽에 난 서브웨이에 갔고 투데이메뉴를 외쳤다. 선배들은 그만 좀 싸 오라고 성화였지만 본인들이 챙기긴 싫었는지 주는 데로 먹었다. 생각해 보면 참 좋은 선배들이었다. 몇 주간 거의 매일 갔음에도 거인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국으로 오는 날 아침까지도 샌드위치를 사러 갔지만 작별의 인사는 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당연히 서브웨이가 없을 거라 생각해서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잊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걷다가 외국인들이 많이 있는 거리에서 서브웨이를 보았다.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투데이 메뉴가 없어 당황해서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니 젊은 직원이 요즘은 이 메뉴가 잘 나간다며 어떤 메뉴를 추천해 주었다. 다행이다 싶어 그걸 주문했다. 


빵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치즈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빵을 데울까요? 야채는 뭘 넣으시겠어요? 안 드시는 것은 있나요? 소스를 골라주세요, 세트로 하시겠어요? 등등 엄청난 질문이 쏟아졌고 난 잘 들리지 않는 그 질문들을 이해하느라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결국 주문을 마치고 샌드위치를 받기는 했다. 내 뒤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면 당황해서 그냥 도망 나왔을 것이다. 사무실로 가지고 와서 먹었는데 캐나다에서 먹은 그 맛과 다를 바 없어 좋은지 나쁜지 모를 묘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종종 난 서브웨이를 방문해서 샌드위치를 먹곤 했다. 손님도 별로 없고 한적하고 퀄리티는 나쁘지 않아 비싼 가격임에도 종종 들렸다. 


이제는 집 근처에도 생길 정도로 매장이 많이 늘어났고 사람들도 많아졌다. 오늘 밖에 나온 김에 서브웨이를 먹으러 갔다. 많이 먹다 보니 내가 먹는 메뉴와 방법은 정해져 있다. 이탈리안 BMT요, 치즈는 아메리칸 치즈, 빵은 오트밀, 데워 주시고 야채는 모두 주세요. 소스는 허니머스터드와 스위트 어니언. 내 메뉴를 중얼거리면서 자신 있게 들어갔다. 


그런데 세상은 날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샌드위치가게조차 빠르게 날 스쳐지나 미래로 갔다. 모든 주문은 키오스크를 통해 하도록 바뀌어 있었고 키오스크에는 길게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내 뒤로도 사람들이 줄을 섰고 난 긴장해서 머리가 폭발하고 있었다. 키오스크는 낯선 사람들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익숙하지 않은데 전혀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 있어 더 당황스러웠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을 때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긴장감에 터치 실수를 계속 냈다. 세네 번 정도 실수 후에 난 거의 울기직전이었지만 기본주문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결국 기본으로 주문을 완료했다. 주눅이 잔뜩 들어 자리에 앉아 있으니 모니터를 통해 내가 주문한 샌드위치가 나왔음을 알려주었다. 속도는 여전히 빠르다. 손끝에 힘이 안 들어가 겨우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고 먹기 시작했다. 


맛은 그대로였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났다. 이렇게 많은 주문을 해야 하는데 왜 그 거인은 내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을까. 내가 동양인이라서? 너무 이른 아침이라 피곤해서? 아님 어차피 모를 것 같으니 묻기가 귀찮아서? 대충 만들어서 보내자고 생각했을까? 그런데 그때의 서브웨이는 매일매일 새롭고 언제나 맛있었다. 야채와 햄과 소스는 항상 잘 어우러지고 맛있었다. 어제처럼 오늘도 맛있었지만 매일매일이 조금씩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투데이메뉴를 말하기 전에는 절대 먼저 만들기 시작하는 일이 없었다. 그 거인은 내게 친절했던 걸까 불친절했던 걸까. 타인들의 속마음에 대해 항상 궁금해하면서도 알방법이 없어 스스로 부정적인 결론만 내곤 하는 나였지만 오늘은 왠지 그 거인이 날 위해 그렇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 년 전 몇 주간 얼굴을 보면서도 단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던 그 거인에게서 이제야 어떤 마음을 받았다. 너무 늦지 않게 도착했다. 하루종일 주눅 들어 있었던 마음 한편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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