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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Jan 14. 2024

고집스런 짜장면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마흔아홉 번째

오전에 일어나서 출근준비를 하며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중국 노래가 나왔다. 70~80년대쯤 유행했던, 나의 어머니가 좋아했던 노래다. 흥얼거릴 정도로 많이 들었던 터라 바로 기억이 났다. 엄밀히 말하면 홍콩노래일 텐데. 어렸을 때 알았던 중국은 대부분 홍콩이었고 중국은 홍콩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나이 먹고 중국에 가보고서야 알았다. 하긴 그 넓은 나라는 모든 것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달라서 갈 때마다 놀라곤 했다.


중국은 나라도 넓고 사람도 많아서인지 요리가 정말 다양하고 많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 고향요리들만 알고 있고 다른 지역의 요리들은 대표 요리를 빼고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땅떵어리가 작은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는 않으니 그 넓은 땅을 생각하면 당연히 수긍하게 된다.


어렸을 때 난 짜장면이 중국요리인 줄 알았다. 아마 그 당시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원래는 중국에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었겠지만 이제 짜장면은 한국 요리가 맞다. 꽤 오래전에 중국에서 일하고 있을 때 중국 동료들과 한식당에 가서 짜장면을 먹은 적이 있었다. 면에 고기볶음 같은 것을 올려놓은 요리가 많기에 익숙할 거라 생각했지만 다들 짜장면이 검은색임에 놀라는 것이었다. 우리야 짜장면을 워낙 오래전부터 먹어서 그게 검은색인 게 이상하지 않았던 거지만 처음 접할 때 짜장면의 색은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검은색 투성이인 요리가 별로 없지 않나 싶다. 대다수의 나라에서 붉은 계통의 색들이 맛있는 요리인 듯하다. 하긴 나도 먹물 리조또 같은 요리를 처음 접했을 때 맛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망설인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짜장면은 나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중국동료들도 한식당에서 먹는 짜장면을 참 좋아했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배달 음식에 대한 기억도 짜장면부터 있다. 초록색 얇은 그릇에 담겨 왔던 짜장면. 먹고 나서도 한참까지 입안에 맴도는 달달한 맛에 벗어날 수 있는 아이가 있을까. 누군가 말하길 짜장과 짬뽕은 비교불가라고 했다. 짜장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하지만 짬뽕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어른들 입맛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추억이 길고 대상이 폭넓은 짜장전문점이 짬뽕전문점에 비해 생명력이 길다고 한다. 물론 요즘은 짬뽕이 대세이긴 하지만.


짜장은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비슷한 맛을 유지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렇다. 해물, 돼지고기, 소고기 등등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조금 달라지긴 해도 베이스는 거의 비슷하다.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먹었던 탓인지 다른 음식들에 비해 개인적으로는 압도적인 선호도가 있다. 누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하면 반사적으로 짜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누가 맛있는 거 먹자고 할 때 "짜장면"하고 외치는 것은 사회생활에 좋지 않기에 대부분 혼자 생각하고 말지만 혼자 밥 먹을 일이 있으면 짜장면을 주저 없이 먹곤 한다. 나는 거의 변함없는 맛으로 짜장을 대하지만 사실 짜장은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물만 해도 요즘 엽차를 주는 중국집은 없지 않나.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사실뿐이라고들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난 나답지 않게 짜장면의 변화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변치 않아서 좋다고 하면서 말이다.


오늘 주저리주저리 짜장면이 생각나는 이유는 어머니의 전화 때문이다. 막 출근한 사무실이라서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평일 오전에 아무 일 없이 전화하실 분은 아니었던지라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건물계단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아무 일도 없이 그냥 하신 전화였다.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어머니는 지나치게 걱정이 많고 점점 고집이 세지고 계시다. 나의 예민한 성격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거울처럼 말이다. 어머니와의 통화는 반가우면서도 날 지치게 한다. 지나친 걱정과 고집스러운 나이 듦을 듣고 있으면 나도 그리 될까 너무도 신경이 쓰인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나빠짐에 대한 걱정에 기인한다. 점점 나빠질 것이라는 예상이 모든 변화를 두렵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나를 위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다고 얘기하고(중얼거리고) 느지막이 나와서 중국집에 갔다. 그 사람은 내가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았다.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사람이 가득했다. 혼자 간 탓에 구석에 있는 작은 자리에 앉아 짜장면을 주문했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 다른 사람 것이 잘못 나온 줄 알았다. 고춧가루를 조금 뿌리고 젓가락으로 비벼서 한입 넣었더니 내가 아는 그 맛이 나왔다. 고춧가루를 뿌리다니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짜장면 위에 있는 오이나 녹색콩은 언제 없어진 걸까. 계란 프라이가 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메추리알에 대한 기억도 있다. 분명 세월에 따라 너무도 자주 바뀌었을 짜장면을 먹으면서 변치 않을 것도 있다는 위안을 얻는 게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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