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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Oct 29. 2023

행복한 도넛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스물여덟 번째

"네 일어났어요, 네 이따가 회사에서 봬요"


"아니요 오전에 잠깐 나갔다가 점심 이후에 들어올 것 같아요. 네 저도 아쉬워요"


집에서 일찍 나와야 하는 나는 막 나가려던 현관에서 모닝콜을 받았다. 몇 번쯤 그 사람에게 난 5시 40분에 일어난다고 얘기했는데 여전히 6시 반에 전화를 한다. 아무려면 어떨까.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고 하루를 시작하니 보통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요즘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서 자제를 하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나마 아침 습관은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이참에 아침에 먹는 약을 줄여볼까 하는 겁 없는 생각도 들었다.


좁은 아파트단지들 사이로 나와서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커피가 먹고 싶어졌다. 오늘 한잔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열려있는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메뉴판은 대부분 칠판에 분필로 적혀있었고 바리스타로 보이는 주인장 뒤에는 나무현판에 해당 커피가 누구도 착취하지 않는 곳에서 재배되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누구도 착취받지 않으면 과연 세상이 돌아갈까? 내게 일상인 어떤 것은 누군가 보기에 착취일 경우도 많을 텐데. 착취와 공정한 노동은 누가 구분하는 걸까?


친환경을 넘어 동물 복지 계란이라던가, 공정 무역 커피라던가 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가진 음식들이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전 어느 때부터인가 일부 기업들이 지구를 지켜줘 라면서 환경파괴를 하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상품을 소개하기 시작했었다. 아마 진심으로 그렇다기보다는 트렌드에 따른 마케팅의 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내가 삐딱하게 생각한다고? 난 원래 삐뚤어져 있다. 그렇기에 동물 복지, 공정무역등의 얘기를 들었을 때 또 시작이네 하고 시큰둥해 버렸다. 기업이윤이 최고의 목표인 주식회사들이 주주의 이익을 감소시키면서까지 사회적 공익을 더 신경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의 재화는 거의 일정할 것이고 더 가진 사람이 생기면 덜 가진 사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월급을 받는 노동자들은 20세기 동안 꾸준히 노력한 끝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개선해 왔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자본주의는 극단으로 치달아가고 노동자는 스스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공정, 상식이 없는 시대가 오니 모든 가치 기준이 돈이 되어서 그런 것 같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노동자의 위치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 월급이 오르길 바랐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지속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던 중 뉴스에서 한 노동자가 일을 하던 중 빵 반죽기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주 젊은 나이였기에 한동안 이슈가 되고 해당 기업은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불쌍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 불매 운동에 관해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내 일이 아니니까. 그러던 어느 날인가 편의점에 빵을 사러 갔는데 초등학생들로 보이는 애들 무리가 빵을 고르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빵은 안돼. 그거 피묻었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자세히 빵을 살펴보니 그 불매운동을 당하는 기업의 제품이었다.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완전히 잊혔던 그 사건이 머릿속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져버렸다. 젊은 여자가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는 기계에 빨려 들어가고 결국 산산이 분해돼서 밀가루가 빨갛게 변해버리는 상상. 실제로 그랬는지 난 찾아보지 않았다. 진짜로 그렇다고 하면 마음 한편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기억 때문인지 그 회사의 물건들이 꺼름직하게 느껴졌고. 슬슬 피하게 되었다. 다른 것들은 다 괜찮은데 가장 아쉬는 것이 도넛이었다. 정말 달달해서 아메리카노랑 먹으면 맛있는 도넛. 내가 자주 갔던 그 도넛 가게가 바로 그 회사의 계열사였다. 커피도 꽤 먹을만해서 가끔 시간이 날 때 들려서 커피와 도넛을 사 오곤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 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동네에 다른 도넛가게들이 꽤 있다. 대체제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도넛 가게들은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도넛은 바로 그 도넛 회사 하나만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그 사람 얼굴도 못 보고 외근 때문에 시내 중심에 있는 백화점에 가야 했다. 미팅이 끝나고 시간이 남아 건물 안을 둘러보다가 젊은 사람이 잔뜩 몰려있는 곳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도넛가게였다. 줄이 한참  길게 서 있었다. 얼마나 많있는 도넛이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넛 따위를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까. 평소 줄 서기를 안 하는 나였지만 너무 오랫동안 달달한 도넛을 못 먹었기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30분 정도 줄을 서니 내 차례가 왔다. 도넛 종류가 참 많았다. 그런데 도넛 한 개에 5000원이 넘었다. 도넛은 원래 싼 맛에 당을 보충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었던가. 새로운 세대들은 기존에 있던 음식들을 많이도 바꿔 놓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두 개 사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커피를 하나 사서 백화점 안의 한쪽 구석에 몇 개 놓여 있는 휴식용 테이블에 앉았다. 포장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도넛이 커서 놀랐다. 입을 있는 대로 크게 벌려서 겨우 한입 먹을 수 있었다. 쫄깃한 도넛 안에 피넛버터가 한가득 들어있어 달콤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달콤하다. 멈출 수 없는 달콤함이 도넛을 계속 목안으로 넘기라고 아우성쳐댔다. 한참을 먹고 나니 온몸에 당이 충전되어 약간은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궁금했다. 이름만 들어보면 완전 미국 회사일 것 같은데 요즘은 한국회사들도 대부분 이름을 영어로 바꾸는 추세라 이름만 보고는 어느 나라인지 알 수 없다. 핸드폰을 들고 검색창을 열었다. 회사 이름을 넣어 검색하려고 했는데 무언가 내 행동을 막았다. 그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알 필요가 있을까. 환경을 파괴하면서 재료를 구하는지, 노예들을 써가며 일을 하는지, 직원들을 전부 계약직으로 바꿔 버렸는지,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해서 가맹점주는 죽어가고 실제로 돈은 사장 한 사람만 버는지, 일을 하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등등 수많은 정보들이 내게 필요한 걸까. 그냥 도넛일 뿐이다. 모처럼 들어온 달콤함을 다른 이유, 다른 생각으로 대체하기 싫었다. 내 알바가 아니다. 난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침내 차례가 되어 내가 분쇄기에 들어갈 때에야 잘못 살아왔음을, 다른 사람들과 연대했었야 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난 도망쳤고 일단 아직까지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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