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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Sep 20. 2023

둘이 함께 잔치국수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열일곱 번째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언제 국수 먹여 줄 거야?라는 얘기가 갑자기 귀에 들어왔다. 요즘도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나 해서 주변을 돌아보니 바로 내 뒤에서 남자직원들 몇 명이 여직원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요즘은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예의가 아닌 시대라 알고 있었는데 나의 착각이었나 보다.


어렸을 때 친구의 언니, 오빠, 형, 누나들이 결혼을 하면 동네잔치가 열렸다. 우리 동생들은 열심히 국수를 날라야 했다. 초대받지 않은, 아예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들어와서 음식을 먹고 가다 보니 수백 개의 국수를 날라야 했다. 국수가 갈비탕으로 변하는 것도 잠시 이제는 결혼식장 음식은 뷔페가 대세이다. 뷔페음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에 따라 결혼식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고 하니 신부들의 자존심 경쟁이 붙을 만도 하다.


토요일에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 갔었다. 나이가 있다 보니 장례식 갈 일은 늘어나지만 결혼식이나 돌잔치 갈 일은 별로 없어 정말 오랜만에 간 결혼식장이었다. 팀 동료이다 보니 끝까지 남아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난 물론 안 찍었다. 혼자 밥 먹고 빨리 가고 싶었지만 팀장이 다 같이 밥 먹자고 해서 사진 찍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뷔페식당으로 이동했다.


다른 결혼식 뷔페와 다를 바 없었다. 중국요리, 해산물, 고기, 디저트 등등 종류별로 분류되어 놓아 진 보온워머를 따라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덜 조리된 해산물이나 고기종류를 많이 먹으면 배가 자주 아픈 나는 완전히 조리된 중국음식들을 많이 먹는 편이다. 중국음식들은 인기가 없어 가져오기도 편하다는 이유도 있다. 한 접시 가져와서 먹고 있는데 회사 동료가 회를 가득 담아와 내 앞에 앉았다. 아마 앉을자리가 내 앞자리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산더미 같은 회 접시와 잔치국수 한 그릇을 내려놓으면서 자기는 요즘 결혼식장에 오면 잔치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꼭 한 그릇씩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제 사무실에서 국수 언제 먹여줄 거냐는 시답지 않은 얘기를 목청이 터지도록 했었나 보다. 그런 거 물어본 적 없어요 하고 싶었지만 그 옆에 앉은 다른 동료가 좋은 것도 많은데 굳이 잔치국수를 먹느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고 웃기만 했다.


'맞다 잔치국수가 있었지'


난 내 접시의 음식을 먹다 말고 일어나서 뷔페 테이블로 다시 갔다. 한참을 찾은 끝에서 한쪽 구석에서 잔치국수를 찾았다. 메밀국수, 잔치국수 이렇게 두 개의 면 요리가 있었다. 잔치국수 코너에는 동그랗게 말린 소면이 들어 있는 작은 그릇들이 몇 줄씩 쌓여있었고 옆에는 커다란 육수통과 고명들이 있는 사발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국물을 받은 다음 원하는 고명을 올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난 그릇에 육수를 따르고 김가루, 계란 지단, 호박, 파 등등을 얹어 자리에 돌아왔다. 한 모금 마셔보니 멸치로 육수를 낸 국물이었는데 제법 잔치국수 맛이 났다. 한 그릇 호로록 먹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치국수를 가져온 사람들은 국물만 조금 먹고 대부분 국수를 남겼다. 잔치국수를 좋아한다던 동료의 그릇 안에 남겨진 국수는 퉁퉁 불어 버려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는 다른 음식을 가지러 갔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한두 사람씩 자리를 뜰 때 나도 그 지루하고 긴 결혼식장을 나와서 집으로 갔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나왔지만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토요일 하루가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갔다.


일요일에 일어나니 비가 오고 조금 쌀쌀해진 탓인지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낑낑대고 일어나 국숫집까지 한참을 걸어갔다. 꽤 유명한 국숫집인데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장사를 안 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영업은 하고 있어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4인 테이블에 여유롭게 앉아 국수가 나오길 기다렸다. 한참 후 종업원이 엄청 큰 대접에 각종 고명이 잔뜩 올라간 잔치국수를 가져와 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양이 정말 많았다. 한 입 먹으니 육수가 정말 진하고 맛있었다. 역시 결혼식장에서 먹은 잔치국수는 맛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날은 너무 오랜만에 먹어서 잔치국수가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었다. 잔치국수를 이렇게 시켜 먹은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에게 언제 국수를 먹여줄 거냐고 물었던 친구가 있었다. 잔치국수처럼 소박하고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난 그 친구가 내게 마음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난 그 친구에게 친구이상의 마음이 있지 않았다. 누가 촌스럽게 국수를 먹냐고 요즘은 전부 뷔페라고 말했었다. 자신 있던 젊은 날이었다. 그 사람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많은 것이라고, 내 미래는 그와 다를 거라고 믿었다. 오늘 혼자 커다란 잔치국수를 먹고 있으니 나 자신은 과연 잔치국수보다 나은 삶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화려한 뷔페보다 소박한 국수가 좋은 나이가 되었는데 좋은 사람들은 전부 떠나버리고 나만 혼자 작은 그릇에 눌러앉아 퉁퉁 불은 국수처럼 버려지길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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