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면아래 Jan 24. 2024

플란다스의 바게트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쉰두 번째

무엇인가를 끊는 것은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오랜 경험으로 볼 때 서서히 줄여 나가기보다는 한 번에 끊는 것이 나에게는 맞다. 의사 선생님이 약의 용량을 줄이면서 끊어야 한다고 누누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약에 의존하는 이상 그것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은 내 몸이 잘 알고 있다. 뭐든지 난 한 칼에 끊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되돌이표처럼 되돌아갔다. 사랑처럼. 아침 우울증 약을 끊은 지  꽤 되었다. 최근에는 수면제도 먹지 않고 있다. 조제는 받았지만 먹지는 않고 있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행복은 오지 않았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기분이 널을 뛴다. 잠을 못 자 몽롱하다. 한평생 담장밖에 나가지 못해 널뛰기를 하며 밖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기분이 큰 폭으로 진동한다. 온몸이 물에 빠진 듯 축축하다.


하루종일 안절부절못하다가 집에 왔더니 온몸에 힘이 빠져 입맛이 없다. 한동안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거르는 것도 습관이 되는지라 조심하고 있다. 빵이라도 살까 하고 느지막하게 동네 빵집에 갔다.


8시가 밖에 안되었는데 어쩐지 가게문을 닫기 일보 직전이었다. 진열대의 빵도 예쁘장한 케이크 몇 개와 바게트빵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케이크를 먹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내 한쪽 팔보다 큰 바게트 하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빵을 자르려고 도마에 올려놓고 빵칼을 찾으니 보이지가 않았다. 톱같이 생긴 빵칼로 잘라야 빵이 뭉개지지 않고 잘 잘라진다. 한참을 찾다가 못 찾아서 빵 앞에 다시 앉았다. 그냥 먹어 볼까 하고 끝을 깨물어 보았는데 너무 딱딱해서 이가 들어가지 않는다. 치아가 부러질 것 같은 딱딱함이다. 그냥 아무 칼이나 꺼내서 잘라야 할까 생각하는데 마땅한 칼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칼로 잘라야 하지?


어렸을 때는 빵이 흔하지가 않았다. 대부분 공장에서 만든 빵이었고 빵집은 서울에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TV에서 보는 바게트는 궁금증이 더해지면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종이봉투에 바게트빵을 사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그걸로 샌드위치등을 만들어 먹는 게 너무 멋있게 보였다. 후줄근한 집에서 잡곡에 새우젓을 찍어먹고 있는데 TV에서는 멋진 집에 생긴 것도 잘생긴 선남선녀들이 바게트를 들고 집에 들어가 칼로 썩썩 잘라먹으면 그게 얼마나 멋있던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주인공들이 손으로 뜯어먹으면서 이야기 꽃을 나눌 때도 있었는데 그건 더 멋있었다. 이 빠진 그릇에 밥에 물을 말아 새우젓이라도 먹는 게 그나마 중산층이었으니 삶의 격차가 너무 컸다.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 자체가 너무 멋있는 어린 시절이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모두를 따라잡았지만 마음은 생각만큼 빠르게 따라오지 못해 내 마음속에는 서양문물에 대한 동경은 계속 남아 있었다. 수없이 많은 빵집이 생기고 식당에서도 빵을 주었다. 바게트를 얇게 잘라서 마늘을 올려서 구워 주기도 하고 바게트빵에 햄이나 야채를 넣어 샌드위치로 주기도 했다. 일상이 돼버리면서 바게트에 대한 동경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오늘 바게트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알 수 없는 슬픔만이 올라왔다. 누군가 바게트를 먹으면서 죽었던 것 같은 기억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것은 과거가 점점 또렸해진다는 것이다. 잃어버리는  오늘만큼 과거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것 같다.


맞다. 어린 시절 플란다스의 개라는 만화가 있었다. 부모를 잃고 파트라슈라는 개와 열심히 우유 배달을 하는 어린아이에 대한 만화였다. 주인공은 힘들지만 열심히 살았다. 만화에서 가끔 그 주인공이 작은 바게트빵 같이 생긴 것을 사다가 먹었다. 바게트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이다. 가난한 바게트에 대한 기억. 그때 그 빵이 어떤 맛일까 궁금해하면서 주인공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주변 사람들도 점점 주인공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만화는 다들 아시다시피 처절하게 막을 내린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서 그 바게트는 완전히 지워버렸었다. 내 삶도 힘든데 굳이 남의 힘든 삶과 동화되기 싫었다. 바게트는 그냥 동경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빵칼이 없어서 식칼을 가져왔다. 어디서 자를까 고민하다가 빵 끝을 잘라서 먹었다. 꽤 짭짤하다. 예전 바게트는 달았던 것 같은데 요즘 바게트는 짭조름한 것인가. 조금 더 잘라먹었다. 역시 짭짤했다. 집에 바를 잼도 없고 해서 바게트를 녹차와 같이 먹었다. 그래도 계속 짠맛이 느껴졌다. 원래 그런 것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빵이 아니라 다른 짭짤한 맛이 입속으로 계속 넘어오고 있었다. 난 계속 울고 있었다. 짭짤한 눈물이 내 입속으로 빵과 같이 넘어왔다. 무엇이 날 울게 하는지도 모를뿐더러 울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는 행복했을까? 그랬어야 한다. 나도 그러고 싶으니까. 하루종일 기분이 널을 뛰고 있다. 사라지고 싶다. 이 축축한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 죽고 싶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 매분 매초 나는 갈망한다. 행복하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이방인의 양꼬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