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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Jan 21. 2024

이방인의 양꼬치

100개의 마음, 100개의 요리. 쉰한 번째

영화나 TV에서 보면 주인공이 잠을 못 자 괴로워하다가 수면제를 먹고 잠드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게 왜 멋있어 보였을까. 수면제를 처음 처방받아서 먹었을 때 잠이 오지 않아서 놀랬다. 영화에서 처럼 픽 하고 기절할 것을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요즘 수면제는 그렇게 까지 강하진 않나 보다. 이에 대해 증상을 얘기했더니 항우울증 약과 같이 먹으라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수면제는 잠을 들게만 할 뿐 잠을 지속시켜주진 않기 때문에 수면제와 잠을 지속시켜 주는 약과 우울증 약을 같이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이걸 다 같이 먹으면 아침에 정신이 몽롱하다. 약을 먹었을 때는 기절하듯이 잠들었다가 아침이라고 생각되어 번쩍 눈을 뜨면 한 시간만 지나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제는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많다. 오히려 아침에만 정신을 못 차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먹지 않기로 했다. 처방받는 약을 약통에 모으기 시작했다. 벌써 수십 개가 통 안에 쌓여간다.


누군가 잠이 안 오면 양을 세어보라고 했다. 눈을 감고 양을 세라니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효과가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어느 날인가 정말로 양을 세어봤는데 생각을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양꼬치까지 가게 되었다.


2010년 전후로 회사의 중국 출장이 잦아졌다. 회사사람들은 중국출장을 싫어했다. 처음에는 대도시인 상해나 북경으로 자주 나갔지만 점점 들어본 적도 없는 시골 도시들로 출장이 잡히면서 힘없는 나에게 그런 출장이 돌아왔다. 중국 출장 갔을 때 거리에서 칼에 찔렸다느니 장기 적출을 당했다느니 인신매매를 당한다느니 하는 애기들을 너무 많이 들어서 나는 공포에 떨면서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 처음 간 곳은 베이징 위에 있는 선양이란 도시에서도 차로 두 시간을 걸려 들어가는 곳이었다. 당시 중국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북경공항에서 다시 선양공항으로 갔고 거기서 택시를 탔다. 당연히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주소지가 적힌 종이를 주었더니 중국말로 내게 계속 뭐라 하지만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택시가 갑자기 출발을 했다. 30분 정도 지나자 시내를 빠져나와 황량한 들판으로 차가 들어갔다 한 시간을 계속 달렸다. 이런 사막에 묻히면 영원히 내 시체를 찾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가끔 나를 돌아보며 담배를 피우는 택시기사의 인상은 나빠보이지 않았다. 두 시간을 달려서 어느 시골의 호텔 앞에 나를 내려 주었다. 그 주소는 아마 호텔 주소였나 보다. 기사가 종이에 쓴 금액만큼 얼른 챙겨주고 차에서 내렸다. 황량한 도시였다. 8차선은 되어 보이는 길은 도로가 있긴 하지만 모래에 반쯤 덮여있었고 모든 건물들은 회색빛으로 허물어질 것 같았다. 원래는 탄광도시였다가 이제는 더 이상 광업을 하지 않아 정부지원으로 건물들을 세우기 시작한 곳이라고 듣고는 왔지만 그 황량함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서둘러 호텔로 들어가니 프런트에 젊은 여자 둘이 있었는데 영어가 전혀 되지 않았다. 내가 만나기로 한 통역사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내가 프린트해 온 종이를 한참을 보더니 뭘 자꾸 달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여권을 달라는 거였다. 왜?라고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30분간을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하고 지금은 알게 된 야진(보증금)을 주고 나서야 난 카드키를 받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의외로 방은 넓고 깨끗했다. 창밖의 황량한 마을과 깨끗하고 넓은 나의 방이 마치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게 기억이 났다. 호텔로비로 나왔지만 직원들은 날 신기하게 쳐다만 볼뿐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외부인인 나와 그들과의 거리가 어쩐지 작은 안심이 되었다. 밖에 나오니 길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의외로 깨끗한 가로등이 인도를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차와 오토바이가 어지럽게 주차되어 있어 인도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멀리 몰같은 곳이 보였다. 커다란 라이트가 바닥에서 3~4층 되는 대형 건물을 비추었고 노을즈음 그 건물은 이 도시의 모든 빛을 끌어다 쓴 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절로 걸음이 그쪽으로 향가게되었다. 삼십여분을 걷고나서야 그 건물에 도착하였다. 굽이 높은 구두 하나만을 가지고 온 나의 멍청함에 화가 날 즈음이었다. 멋진 외관이 화려한 조명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들어가는 문이 없었다. 그리고 건물만 빛이 날뿐 그 앞 광장은 마치 한국의 칠팔십년대 기차역 광장처럼 크기만 할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 광장 한쪽으로 수없이 많은 연기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나도 그쪽으로 갔다


꼬치집들이 었다. 강철과 벽돌로 만든 조악한 꼬치구이 기계를 가지고 나와 수백 명은 될듯한 사람들이 꼬치를 굽고 있었다. 한 사람이 한 개의 기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기계가 끝없이 늘어서 있어서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가게들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외양과 행색이 다른 내가 가까이 가자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갈라졌다. 침묵속에 갈라진 그 길에는 나의 구두 소리만 조그맣게 들려왔다. 난 한 가게 앞으로 갔다. 주머니에는 한국돈으로 천 원 정도의 돈이 있었다. 숯불 위에 알 수 없는 고기 꼬치들이 계속 구워지고 있었다. 주인은 무표정하게 날 빤히 쳐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날 쳐다보았지만 이상하게 부끄럽지가 않았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한국에서는 닭꼬치가 한 개에 천 원이지만 여긴 물가가 낮으니까 두세개는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돈을 받은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숯불 위에 있던 모든 꼬치를 꽃다발처럼 모아서 내게 주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배를 잡고 웃었다. 난 영문을 몰랐지만 웃음이 났다. 손에 꽃다발 같은 꼬치다발을 든 이상한 한국인이 움직일 때마다 아이들이 따라왔다. 어른들은 멀리서 계속 날 보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비웃음 같지 않고 왜인지 즐거운 웃음으로 들렸다. 아이들에게 꼬치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환하게 웃는 아이들. 어느덧 내 손안에 한 개의 꼬치만 남게 되었지만 아이들은 깔깔거리면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마지막 남은 하나를 먹으며 호텔로 돌아왔다. 광장을 지나자 아이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난 혼자 걷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그 웃음소리가 한가득 날 계속 따라왔다. 그리고 그날 난 잠이 찾아오는 밤을 오랜만에 만났다. 완벽한 이방인이 되자 거짓말처럼 불면증이 사라지고 잠이 가득한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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