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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Nov 29. 2023

빨간 얼굴의 육개장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서른여섯 번째

금요일 오후에 누군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을 받으면 고인과 추억이 있었던 경우에는 눈물 먼저 나기 마련이지만 데면데면한 회사 동료의 누군가나 이미 남보다 멀어진 먼 친척의 경우는 언제 가야 할까하는 고민을 먼저 하게 된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장례식장에 가면 밤늦은 시간이 될 것이고 토요일에 가자니 왠지 하루를 통째로 날리게 될 것 같다. 일요일은 대부분 발인이라 가족 외에는 잘 가지 않으니까 제외하면 역시 갈 날은 금요일 밖에 없다.


늦게 일을 마치고 긴 시간을 들여 집에 와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매무새를 정리하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출발했다. 장례식장들이 대부분 외곽에 있는지라 불편한 옷차림으로 대중교통을 타기도 힘들고 저녁시간에 러시아워를 뚫고 자동차를 끌고 갈 자신도 없어 택시를 타고 출발하였다.


먼 친척의 장례식장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아는 친척과 모르는 친척이 뒤섞여 있는 사이로 계속 인사를 다녀야 하고 너는 언제 결혼할래라는 등의 폭언을 듣기 싶상이라 더 가기가 싫어진다. 내 나이대의 사람들을 찾아 겨우 자리에 앉긴 하지만 겹친 기억에 대한 수다는 잠시일 뿐 이미 결혼했거나 아이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화제는 당연히 그쪽으로 넘어간다. 누가 모은 돈도 없는 나이 많은 싱글 회사원의 출장 얘기 따위를 듣고 싶겠는가. 그래도 입을 다물고 웃기만 해도 되는 자리라 훨씬 편하다. 언제 봤다고 반말로 예의 없는 질문을 하고 너무나 사적인, 하고 싶지 않은 대답 따위를 원하는 자리에 앉게 되면 밥상위에 있는 모든 음식을 테이블보 종이로 싸서 면상에 던져버리고 싶어 지고 싶기 때문이다.


조용히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일하시는 분이 음료수와 반찬을 놓으면서 식사는 뭘로 할 거냐고 묻는다. 순간 뭐가 있냐고 물을 뻔했지만 아주머니는 육개장과 소고기 뭇국이 있다고 뭘 드시겠냐고 했다. 당연히 육개장을 시켰다.


육개장은 장례식장에서 먹는 게 제일 맛이 있다. 엄청나게 많은 재료들을 큰 솥에 넣고 한참을 끓여낸 맛은 일반 식당에서 냄비에 대충 끓여서 내주는 것과 비교가 안된다. 최근에는 다양한 육개장 전문점들이 많이 생겨났다. 아니 생겨났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 체인점들은 일반식당에서 파는 심심한 육개장이 아니라 큰 솥으로 푹 고아진 맛이 났었다. 그런데 그런 체인점들에서 먹을 때는 육개장이라기보다는 짬뽕 같은 느낌의 맛이 났었다. 걸쭉하게 볶은 느낌의 짬뽕.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육개장을 먹고 자란 세대로서 그건 진짜 육개장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최근에 먹은 맛있는 육개장은 전부 장례식장에서 먹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먹으니 옷에 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반찬을 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전 두세 개, 간자미무침, 떡 한두 개, 김치, 편육 등등이 나왔다. 나온 모양새가 정말 공장에서 만들어온 모양새 그대로였다. 이제 대부분의 음식을 사오고 장례식장 식당에서는 밥과 국만 한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전 한 개를 먹어보니 냉동 전보다도 맛이 없었다. 어차피 큰 기대가 없었던 지라 마른 진흙으로 만든 식감을 가진 떡 한 개를 먹다가 바닥에 내려놓고 육개장이 나오길 기다렸다. 옆 테이블에서는 얼굴만 겨우 기억이 나는 친척들이 벌써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보통 반찬과 육개장이 같이 나오는데 이렇게 늦게 나오니 슬슬 걱정이 되었다. 육개장의 맛은 끓인 시간에 비례하는데 너무 적은 시간 끓여서 아직 준비가 안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드디어 아주머니가 종이그릇에 담긴 육개장과 밥을 가지고 왔다. 종이그릇에 플라스틱 수저, 껍질이 까지는 질 나쁜 나무젓가락은 정말 최악의 조합니다. 특히나 하얀 플라스틱이 빨간 육개장 국물에 물들어 가는 모습은 이상하게 식욕을 떨어 뜨린다. 하지만 한 모금 먹어보니 역시 나쁘지 않았다. 항상 알아온 육개장의 맛. 고추기름이 살짝 떠있는 텁텁하지 않은 국물맛의 육개장. 하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 고사리 한두 개, 무 조각 두 개, 고기 세 점. 그리고 국물은 종이컵으로 한 컵이나 될까. 그런데 밥은 왜 이렇게 많이 주시는지. 부족하면 더 주시겠다고 하시지만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계속 리필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는 않다.   


대충 먹고 입을 닦고 앉아 있는데 들어온 지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언제쯤 일어서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아는 척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중학교 때까지 나와 정말 친했던 외가 쪽 사촌이었다. 나에게 이모네 집은 내 집보다 편했고 어린 날 긴 시간을, 특히 수없이 많은 방학을 사촌과 보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촌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고 외국으로 학교를 가면서 가끔 경조사에서만 만나고 문자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추억은 세월 앞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세월은 모든 것의 농도를 낮춘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나도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손을 잡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어디에 사는지 수다를 떨다가 그 친척은 갑자기 말을 낮추면서 며칠 전 주말에 나를 보았다고 속삭였다. 내가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고 분위기가 너무 좋아 보여서 말을 걸지 않았다고 했다. 순간 내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빨개진 얼굴을 얼굴을 보며 사촌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우리 정말 한번 같이 보자"


얼떨결에 그러자고 꼭 그러겠다고 답했다. 사촌은 웃으면 손을 놓고 다음에 보자고 하며 다른 사람들 무리로 걸어갔다. 항상 속이 깊은 아이였다. 난 이제 이렇게 속좁고 세상과 단절한 외톨이가 되었는데 나의 사촌은 여전히 좋은 삶을 살아온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그 안으로 들어갈 일이 있을까? 내 사람을 소개하고 그들과 가족이 되고 다시 웃고 떠들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다. 간절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 웃으며 인사하고 모두의 손을 잡고 싶다. 차갑게 식은 육개장을 보며 소원을 빌었지만 이루어질까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발씩 앞으로 계속 나가면, 몇 발짝 다시 굴러 떨어져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나가면 언젠가는 이 어둡고 깊은 터널에서 나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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